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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수) 18:00~21:00간 고대교우회관에서 정기 고연전 결단식이 개최되었다.승명호 교우회장, 김동원 모교 총장, 유인선 고우체육회장, 한윤상 수석부회장, 전현주 여자교우회장을 비롯해 체육위원장과 5개 운동부 감독, 코치, 선수 등 총 200여명이 참석했다.올해는 고연전 100주년과 정기 고연전 60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더해진 가운데, 현재까지 정기 고연전 역대 전적은 20승 11무 20패로 팽팽한 경쟁을 이어오고 있다. 고대교우회는 올해 5월부터 4개월간 필승기금모금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37만 교우들의 필승의지를 결집시켰다.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정기 고연전을 앞둔 5개 운동부와 응원단, 총학생회에 격려금 전달식이 거행되었다. 경영대·문과대 교우회가 야구부, 법대·이과대 교우회가 빙구부, 생명과학대·공과대 교우회가 농구부, 정경대·사범대교우회가 럭비부, 의과대·간호대·보건과학대 교우회가 축구부에게 격려금을 전달했다.
202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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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월)18:00-20:30간 25년도 미래인재 장학증서 수여식이 교우회관 안암홀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승명호 교우회장, 김동원 총장, 왕정분 전임 장학위원장, 장학회 이사 및 교무위원, 그리고 장학금 기탁 단체 대표와 장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학기에는 총 434명의 장학생이 선발되어 총 13억 3천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한다.재단법인 고우장학회는 지난 1979년 발족 이래 현재까지 총 1만 6천명의 학생에게 477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다.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오랜 기간 고우장학회 이사로 봉사한 김규태, 황병조, 전병일, 이주태, 이재필, 이충희 교우가 장학회 명예이사로 위촉되었으며, 승명호 (재)고우장학회 이사장을 필두로 신임 한윤상, 임재풍, 김미숙, 송재현, 송군호, 서동원, 조윤성, 김옥희, 이호준, 황유선 이사와 박현숙 장학회 자문위원이 위촉되어 새로이 임기를 시작하였다.
2025-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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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응원단장의 카리스마는 타고난 기백과 혹독한 연습으로 완성된다.2-4. 응원 오리엔테이션, 입실렌티 등으로 불태웠던 대학 생활5. 법률사무소 예지 대표변호사로 활약 중인 현재6. 응원단장의 상징인 크림슨색 두루마기를 입고 교정에서가슴속에 터지는그 때 그 잠실벌오규백(식자경94) 응원단 OB 호응회장1997년 고대 응원단장이자 현재 응원단 OB ‘호응회’ 회장을 맡은 오규백입니다. 여느 때처럼 변호사 업무로 바쁜 나날이지만, 이번 여름은 호응회가 주최하는 ‘하이 입실렌티’를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네요. 그럼에도 승명호 교우회장님을 비롯한 고대교우회에서 성심껏 도와주시니, 감사한 맘으로 하루하루 ‘즐기고’ 있습니다.잊지 못할 나의 첫 고연전기상 관측 사상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던 1994년, 저는 정기고연전 대비 여름 훈련을 하며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당시 모교 대운동장 계단석을 뛰면서 오르내리다 구르는 바람에 한 달 동안 다리에 깁스를 했는데요. 다친 다리는 뒷전이고, 여름 내내 고생했는데 선배들이 응원단상에 안 세워줄까 걱정에 어찌나 마음을 졸였던지요(웃음). 우여곡절 끝에 잠실벌에서 정기고연전 응원단상에 처음 선 순간, 마지막 축구 경기의 승리로 고대가 우승한 순간, 그때의 성취감은 평생 잊지 못합니다.전교생이 교가를 외우는 학교는 고대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1997년 정기고연전 둘째 날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응원단장으로서 마지막으로 교가 지휘를 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당시만 해도 경기를 마치고 마지막 교가를 부를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고대만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2만 학우와 교우들이 모두 정자세로 서서 저의 지휘에 맞춰 무반주로 입을 모아 고대 교가를 부를 때, 제가 고대인인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웠습니다. 변함 없는 열정, ‘응원’이라는 마법1970~1980년대 고대 응원은 응원단원의 개인기를 뽐내는 ‘박수 응원’과 응원가를 부르며 동작을 하는 현재 방식이 혼재했습니다. 제가 응원단을 하던 90년대는 박수 응원이 점점 쇠퇴하는 대신, 기발하고 다양한 응원가와 응원 동작이 생겨난 변화기였습니다. 이렇게 응원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고대생들이 응원할 때 뿜어내는 열정입니다. 개인적으로 응원곡 중 ‘엘리제를 위하여’를 가장 좋아하는데요. 심장을 고동치게 만드는 전주 뒤에 양팔을 위로 힘껏 뻗으며 ‘가슴속에 터지는’을 외칠 때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날아갑니다. 고대인들은 각자 ‘응원’이라는 마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의 정서를 느끼고 싶다면, 재학생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면, 응원가를 불러 젖히면 됩니다. 교호, 승리호를 외치면 됩니다. 이처럼 ‘응원’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를 하나로 묶는 고대만의 문화입니다. 100년 동안 이어온 고연전과 응원 문화를 다가올 100년 동안에도 우리 후배님들이 잘 지키고 가꾸어 나갔으면 합니다. 이 더운 여름 비 오듯 땀 흘릴 모교 선수들과 응원단원들을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면서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모교의 영광을 위해 힘을 다하되 즐겁게 뛰면 좋겠습니다. 부담감은 선배들에게 돌리십시오. 이미 승리는 여러분의 것입니다.이현화 선임기자
202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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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야구부 시절, 연습장으로 찾아온 팬들에게 그는 꼭 '高大'가 들어간 사인볼을 줬다. 2. 과선배이자 야구부 선배였던 선동열(경영81) 선수와 함께3-4. 모교 졸업 후, OB베어스 시절10전9승 ‘연대킬러’즐기는 자가 이긴다박노준(경영82) 우석대 총장대한민국 프로야구가 딱 1982년에 출범했습니다. 지금처럼 여가문화가 풍성하지 않을 때라 지역팀을 기반으로 고교야구가 상당한 인기였죠. 고1부터 주전으로 뛰면서 많은 사랑을 받은 덕분에 고대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고대=교우 간의 끈끈함’은 워낙에 유명하잖아요. 그리고 제가 ‘이왕이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주의라, 이미 81학번 선동열 선배를 비롯해 고대 야구부 선배들이 아주 쟁쟁했기 때문에 ‘우리가 뭉치면 천하를 휩쓸겠다’는 생각도 솔직하게 있었습니다(웃음).감사하게도 故 최남수 감독께서 1학년임에도 투타 겸업을 시켜주셨어요. 잘하고 싶고, 또 빨리 적응하려고 열심히 하다 보니 1982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MVP도 되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은 고대 야구부, 겨울에는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4년 내내 열심히도 뛰었는데요. 승부욕을 조금 내려놨었다면 어깨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도 있습니다.‘즐기는 자’가 진짜 승자다고대 들어와서 딱 네 번 하는 고연전, 얼마나 긴장돼요. 국내 리그에서 아무리 많이 이겨도 고연전을 지면 1년 동안 와신상담하는 거예요. 고대 들어올 정도면 다들 기량이 훌륭한 선수들이거든요. 근데 고연전만 하면 얼어붙어서 제 실력발휘를 못 하는 걸 자주 봤어요. 노력하는 자를 이기는 것이 ‘즐기는 자’거든요. 그래서 이번 100번째 고연전에 5대 운동부 선수들 모두 축제를 즐기는 마음으로 즐겼으면 합니다. 다행히 저는 연대 경기에선 긴장을 안 해서 ‘연대 킬러’라고 불렸어요. 자랑이 아니라, 4년 동안 10번 붙어서 9번을 이겼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리 9번을 이기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4학년 고연전을 졌다는 거예요. 경기 전날도 어깨가 많이 안 좋았는데 던졌고, 결과가 안 좋았죠. 아홉 번 지는 동안 연대가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도 싶고, 최고참일 때 이겨야 유종의 미를 거뒀을 텐데…. 지금까지 한으로 남았습니다. 1-3.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뉴욕 메츠에서 지도자 연수 시절4. 제15대 우석대학교 총장으로 임기 중인 현재매일 ‘무장’하면 기회가 오더라우리 선수들, 힘들어도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길 바랍니다. 야구부장 교수님 중에 지청 경영대 명예교수도 계셨고 어윤대 전 모교총장도 계셨는데, 항상 ‘학업에 충실하고 인맥을 넓히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뜻을 받들어 학부 시절 운동하는 틈틈이 경영학과 수업을 들었습니다. 비록 전국 수재들만 모인 경영학과 동기들 사이에서 학점은 저조했지만요(웃음). 그렇게 선수 생활과 병행하며 공부를 놓지 않았고, 프로 선수를 마치고 미국에서 연수코치를 하고, 해설위원이 됐다가 우리히어로즈 단장을 하고, 그때 단련한 행정 경영을 바탕으로 교수 생활 끝에 대학 총장이 됐습니다. 평소에 꾸준히 단련하며 ‘무장’했더니, 정말 기회가 오더군요. 한가지 꿈이 있다면 김성근 한화이글스 전 감독님처럼 늦게라도 야구 감독을 해보는 것입니다. 감독님께서 72세까지 정년을 늘려주셨으니, 저도 희망을 품고 잘 준비해 보려 합니다.
202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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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촌묘소에서 번역시화전 마지막 날 (1970.5.7)2. 석탑제 연습 (1968.5.4)3. 김상협 당시 모교총장 댁에 여학생회 임원끼리 세배간 날4. 사은회 날 한복을 차려입고 단체 사진 (1972.2.22)수줍었던 소녀가‘고대 마니아’가 되기까지이현숙(불문68) 68동기회 부회장나는 말이죠, 내성적이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소녀였어요. 오죽 수줍었으면 인사할 때도 고개만 겨우 꾸벅해서 삼촌한테 혼나기 일쑤였죠. ‘여자가 무슨 대학을 가냐’던 시절이었어요. 대다수 여고생의 장래희망도 ‘현모양처’였고. 그런 내가 막내이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고려대학교에 온 거예요. ‘A학점’ 받으려 치어리더 되다고대에 오게 한 은인이 한분 더 계세요. 바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영문법 선생님이신데, 고대 나오셨다고 어찌나 수업 틈틈이 고대 자랑을 하시던지…. 그런데 연대 나오신 영어 선생님은 당시 담임이신데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러니 고려대학교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대학인 줄은 응당 알고 있었어요. 다른 대학은 생각도 안 하고 고대에 왔는데, 와보니 선생님이 말씀을 안 하신 게 있더라고. 어쩜 세상에, 남학생만 그렇게 잔뜩 있는 거예요.내 기억에 당시 입학생이 1400명 정도였는데, 여학생은 50명이 채 안 됐어요. 체육학과가 따로 없을 때라 다른 곳에서 오신 교수님이 여학생들만 따로 체육을 가르치셨죠. 근데 그 교수님이 고연전 치어리더를 하면 4년 동안 A를 주시겠다는 거예요. 키 작고 숫기도 없지만 점수 욕심은 나니 어째요. 번쩍 손을 들고 15명 치어리더 중 하나가 됐죠. 당시 서울운동장, 지금은 없어진 신설동 아이스링크, 장충체육관 등에서 정기고연전이 열렸지요. 연대는 키가 훤칠한 여학생 치어리더들이 서른 명이 넘었으니 우리 고대는 상대적으로 소박했죠. 그래도 기세로는 지지 않았던지라, 당시 <Korea Herald>에 연대생이 아닌 제 사진이 찍혀 있더라고요. 고연전 둘째 날, 법대 동기가 경기장으로 신문을 들고 와서 보여줄 정도로 우리끼린 대단한 이슈였더랬죠. 고연전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뒤풀이죠? 경기가 끝나면 학생들이 종로로, 명동으로 스크럼을 짜고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연대생이랑 서로 잘났다고 패싸움을 그렇게 했다니까요(웃음)? 고연전 경기장부터 시작해서 서울 중심가가 온통 고대생·연대생으로 가득 찼는데, 거리마다 후배들이 먹은 술값을 계산해 주던 선배들이 그렇게 많았답니다. 후배사랑무료주점 창시한 68동기회그런 전통이 이미 있었으니 우리 68동기회가 2001년에 ‘삼성통닭 무료주점’을 기획할 수 있었겠죠. 그 뒤로 68동기회가 한해도 빠지지 않고 입학 50주년인 2018년까지 고연전 때마다 무료주점을 열었지요. 지금은 ‘후배사랑무료주점’이란 이름으로 공식적인 행사가 되었다죠? 비록 무료주점의 시초가 68동기회라고 알려졌지만, 고대의 후배사랑 문화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됐답니다. 그래도 우리 교우회에서 바통을 잘 이어받아서 오늘처럼 큰 행사로 자리 잡은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올해가 100번째 고연전이라죠? 아마 이번에도 68동기 몇몇은 참살이길 어딘가에서 지갑을 열고 후배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68학번에서 이현숙 모르면 간첩’이란 말도 있어요(웃음). 내성적이었던 내가 이렇게 ‘고대 골수분자’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이현화 선임기자 1. 이현숙 교우 현재 모습2, 4. 68동기회에서 마련한 참살이길 무료주점에서 까마득한 후배들과3. 68학번 입학 50주년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뤄 개교기념일에 공로상을 수상했다.5. 정기고연전에서 손자와 함께
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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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3 럭비부 시절, 동료의 연습을 지켜보는 김경진 럭비 지도위원 2-3.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4. 고대 56학번 꽃미남 4인방. 이름도 가물가물한 동기들이지만 가운데 아래 친구의 별명이 '상파(인상파의 줄임말)'임은 분명하다.5. 1956년 교정에서 어머니와6. 4학년 때. 은색 고려대학교 뱃지를 참 아꼈는데 행방을 모른다. 모래 날리던 서울운동장오스카 ‘와일드’가 있었다김경진(영문56) 럭비 지도위원내 인생은 럭비와 음악을 빼면 할 얘기가 없어요. 우리 아버지(김기명金基命)도 보전 출신인데, 만주국 시절 신경(新京, 현재의 창춘)에서 축구부 감독을 하시면서 또 교향악단에서 코넷을 연주하셨거든. 아마 내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나 봐.새뮤얼(Samuel A. Denny, JR.)이라는 한 미국인 교수가 내 자서전을 써줬어요. 라는 제목인데, 1936년에 태어나 격동의 시기를 거친 내 인생이 흥미롭다나. 그래도 고대 입학할 땐 전쟁도 끝났고 비교적 평화로웠지. 합격 발표를 보자마자 어머니가 일하시는 무진주식회사(국민은행 전신)으로 달려갔는데, 어머니가 내 의기양양한 표정만 보고도 ‘붙었구나’ 알았대. 온 회사 사람들한테 “우리 아들 고대 붙었다”고 자랑하셨지. ‘연대 참새’는 우리 상대가 안 됐어나는 중학교부터 럭비를 했어. 고대 럭비부에서는 백스(Backs)중에서 측면공격수인 윙(Wing)을 맡았지. 럭비는 포지션별로 요구하는 체력이 좀 달라. 체격도 크고 힘도 세면 좋지만, 윙은 빠르면서도 날렵해야해. 당시 서울공대, 경희대, 단국대, 각 사관학교 팀들하고 경기를 많이 했었지. 내가 영문과고, 합창 지휘도 했는데 럭비할 땐 또 엄청 터프하다보니 자·타칭 ‘오스카 와일드’라고 불렀어.첫 번째 럭비 정기전? 자세히는 기억 안 나도 그거는 알아. 연대하고 붙은 게임은 내가 있을 때만큼은 진 적이 없어. 상대가 안 됐거든(웃음). 그래도 긴장은 했어. 방심하다 지면 큰일 나잖아. 그래서 겉으로는 “어, 연대 참새 왔어?” 하면서 우리끼리 “야, 오늘 다 죽자!”하고 경기장에 들어갔지. 그때 서울운동장 잔디가 엉성해서 모래에 돌도 있고 한번 넘어지면 살이 쭉 찢어지며 피도 철철 나고 위험했다고. 그럼 그 옆에 이대병원으로 갔는데, 동료들이 그래. “야, 너는 서울운동장에서만 뛰면 잘 다치냐? 너 이대 갈래?” 그렇게 경기에선 앙숙이고 서로 약 올려도 제3의 장소, 이를테면 군대같은 곳에서 만나면 양교출신들끼리 가장 친해. 그러니 졸업하고도 종종 모여서 친선경기를 했지. ‘OB타이거스클럽’이라고, 럭비부 졸업생들의 모임도 있어.1-2, 4. 제1회 고려대:연세대 친선 OB 럭비대회 (1996.6.20)3. 김경진 럭비 지도위원의 현재 모습5. 고려대 럭비부 유니폼6. 럭비부 창단 90주년 감사패 럭비부 후배들, 학업에 충실하길지금 고대 럭비부를 보면, 테크닉이 상당히 늘었어. 우리 때보다 룰도 복잡해졌고, 기술도 그만큼 세분화됐어. 거기에 아주 스피디해. 요즘 친구들이 보면 우리 경기는 슬슬 놀러 다닌다고 할지도 몰라. 그땐 100미터를 11.5초는 뛰어야 했는데, 지금 선수들은 더 빠르겠지? 내가 나이가 90이라 뛰질 못하는데 딱 하나 예외가 있어. 바로 횡단보도에서 초록불 깜박일 때! 그때만큼은 럭비선수처럼 쏜살같이 뛰어. 직업병인지 뭔지, 누가 나를 추월하면 그렇게 자존심이 상해(웃음).우리 럭비부 후배들한테 해주고 싶은 당부가 하나 있어. 나도 철이 늦게 들어서 뒤늦게 석사를 두 개, 박사를 하나 땄는데…. 꼭 학업을 놓지 않았으면 해. 그리고 내가 럭비부가를 만들었는데, 최소 5대 운동부에는 ‘부가’가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어. 고연전 때 응원단이 한 번씩 불러주면 참 좋을 것 같아.이현화 선임기자
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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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가을, 미국 동부 캠퍼스는 붉은색과 푸른색 물결로 갈라진다. 아이비리그 명문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이 격돌하는 미식축구 정기전 “The Game” 때문이다. 이 경기는 미국 최대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 직전 토요일에 열리는 전통 라이벌전으로,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두 학교의 전통과 명예를 겨루는 상징적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 라이벌전의 시작, 조정에서 미식축구까지 1852년 조정경기하버드와 예일의 라이벌전은 1852년 8월, 뉴햄프셔 위니퍼소키 호수에서 열린 조정 대회에서 시작됐다. 이는 미국 대학 간 스포츠 이벤트의 시초로 평가받으며, 이후 ‘대학 간의 대항전’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이 레이스는 미국 대학 스포츠 문화 형성에 불을 지핀 사건으로 이후 아이스하키·축구·농구 등 종목에서도 두 학교는 치열한 경쟁을 이어갔다. 1875년 미식축구 경기 시작1875년 11월 매사추세츠주 뉴헤이븐에서 하버드 선수 네이선얼 커티스가 예일 주장에게 미식축구 경기를 제안하며 역사적인 첫 경기가 성사됐다. 이후 두 학교는 1943~1944년을 제외하고 매년 가을마다 정기전을 이어오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미식축구 라이벌전으로 자리매김했다. “The Game”으로 경기명이 굳어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당시 두 팀이 색이 다른 유니폼을 착용했다는 기록 때문에 미국 대학 스포츠에서 유니폼 경기의 초기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크림슨과 블루: 색으로 이어지는 응원문화고연전에서 붉은 고려대와 푸른 연세대가 맞붙듯, 더 게임의 관중석도 크림슨색과 파란색으로 선명히 나뉜다. 하버드는 1875년 학생 투표를 통해 크림슨을 공식 색상으로 채택했고, 예일은 1894년 블루를 채택했다. 이 색상은 이후 응원 문화의 시각적 정체성을 형성하며, 학교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두 학교는 번갈아 경기를 개최했다. 1945년 이후부터는 홀수 해에는 예일 볼, 짝수 해에는 하버드 스타디움에서 열린다. 이 방식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됐다가 1945년 경기 재개를 계기로 정착된 것으로, 양교 커뮤니티가 균형 있는 상호 방문 전통을 중시한 결과다.1903년부터 1945년까지 “The Game”의 입장권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티켓 중 하나였다. 일부 티켓은 암암리에 거래될 정도로 귀했으며, 뉴욕타임즈에도 티켓 관련 광고가 실릴 만큼 화제를 모았다.전야제와 프랭크 문화라이벌전이 열리는 주말에는 전통적으로 전날부터 학생과 동문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본 경기를 앞두고 친선 풋볼, 럭비 등 학생 참여 경기가 진행되며, 밤새 파티를 즐기며 메인 경기를 기다린다.학생들 사이에서는 경기 전날이나 당일, 상대 학교의 상징물에 몰래 침투해 장난을 치는 ‘프랭크(Prank)’ 문화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예일 학생들이 하버드 캠퍼스에 “Y”를 새기거나, 하버드 학생들이 예일의 동상을 크림슨 색으로 칠하는 등의 장난이 대표적이다. 승패를 넘어선 140년의 전통2024년 기준, 양교는 총 140번 맞붙었다. 성적은 예일이 71승, 하버드가 61승, 무승부 8회로 예일이 근소하게 앞서 있다. 최다 점수차 승리는 1957년 예일의 54-0 완승이며, 하버드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 9연승을 기록하며 라이벌 균형을 다시 끌어올렸다.이처럼 경기의 역사 속에서 양교 모두 압도적인 전력을 보인 시기가 있었기에, 단순한 스코어 우위보다는 전반적인 균형과 전통이 강조되는 라이벌전이기도 하다. 응원과 교우 문화 하버드의 대표 응원가 는 예일을 “Old Eli”라 부르며 “Down with Eli!” 같은 가사로 위트 있게 도발한다. 상대 학교를 직접 언급하는 파이트 송은 경기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며, 이는 고연전의 득점가 문화와도 유사하다.경기 전후 행사에서도 두 학교의 교우 문화가 돋보인다. 자녀를 데리고 경기장을 찾는 동문, 양교의 기념품을 교류하며 화합을 보여주는 모습은 고연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하버드가 공개한 사진 르포에는 가족 단위의 교우, 수십 년 전 팀 주장이 간직하던 경기공, 양교 색을 섞은 기념품을 나누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일부 졸업생 가문은 대를 이어 “The Game”을 관람하는 전통을 이어오며, 가족 단위의 참여가 활발하다.매년 개최 학교는 상대 학교 학생들에게 아침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경기장까지 단체 버스를 운영하지만 요금은 부과된다. 이는 고양 경기장에서 참살이길까지 무료로 제공되는 고려대의 ‘후배사랑 버스’와 비교된다.라이벌을 넘어 공동체: 전통과 경쟁의 선순환하버드와 예일은 미국 엘리트 고등교육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경쟁자다. 미국 정치·경제·언론계 주요 인사 다수가 하버드 또는 예일 출신인 만큼, 이 경기는 미국 엘리트 문화 자체가 투영된 축소판이다. 입학, 연구, 동문 네트워크 경쟁이 치열한 두 대학의 라이벌 의식은 자연스럽게 경기장으로 확장되며 “The Game”의 상징적 무게를 더욱 키웠다.140년의 세월 동안 하버드-예일의 “The Game”은 전통이 경쟁을 만들고, 경쟁이 문화를 만들며, 문화가 다시 학교 공동체를 묶는 선순환을 보여줬다. 100주년을 맞이한 고연전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고연전특별취재팀 유민경, 조영서 기자
20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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