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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영문82) 교우 前 SBS 기자현장에서 배운 방송기자의 본질후배들에게 전하는 공감, 배려, 감사배재학 교우는 35년간 SBS에서 기자, 앵커,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방송 현장을 지켜온 언론인이다. 속보와 특보의 최전선에서 뉴스를 전달했고, 유럽 지역 특파원으로 유럽의 굵직한 사건들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정년퇴직 이후에는 멘토로서 후배들과 만나 언론인의 본질과 인성의 중요성을 전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 배 교우는 모교에서 시작된 자신의 언론 인생과 방송 현장의 치열함, 그리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풀어놓았다.글. 송다연 기자- 모교에서 기억에 남는 추억과, 현재 교우님에게 모교가 지니는 의미가 궁금합니다.“제 인생에서 모교는 절대적인 크기를 가진 공간입니다.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오래 했지만, 결국 제 몸에는 여전히 크림슨색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느껴요. 저는 어디에 있든 고려대 사람으로 살아왔습니다. 해외 특파원으로 파리에 있을 때도 교우 모임에 나가면 가족처럼 느껴졌어요.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제게 모교는 출신 학교를 넘어, 삶의 정체성 그 자체입니다.무엇보다 고려대는 ‘사람의 학교’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배들이 공부하러 왔다고 하면 선배들이 먼저 밥부터 사주던 문화가 자연스러웠어요. 인성과 기본을 잘 닦아온 후배라면, 선배들이 크림슨의 피로 기꺼이 맞아주는 공동체입니다.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재학 시절의 추억도 소중하게 남아있어요. 중앙도서관에서 시험 기간마다 새벽에 줄 서서 자리를 잡던 기억, 법대 후문 하숙집에서 살며 500원짜리 국밥과 학식을 먹던 일상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시험 기간 중앙도서관 자리 잡기는 정말 별 따기였죠.개인적으로는 학교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도 만났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그 인연으로 가정을 꾸려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대학 시절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인생의 기반이 된 시간이죠.”- 모교 졸업 후 방송기자를 꿈꾸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고등학생 때부터 방송에 대한 막연한 꿈은 있었지만, 정보가 많지 않았어요. 문학은 제 성향과 맞지 않았고요. 그러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MBC 방송기자로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굉장히 역동적이고, 다이나믹한 직업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정적인 일보다 현장을 뛰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죠.특히 취재를 마치고 자신의 이름으로 뉴스를 전달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사회 초년병인데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책임을 진다는 것, 즉 자기 목소리로 세상에 말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와 닿았어요.”- SBS 기자로 활동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면요?“앵커 생활을 오래 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치열한 취재기자로서 현장에 더 오래 있지 못한 점은 조금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만 앵커라는 자리 역시 방송기자의 숙명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앵커를 하던 시절은 속보 경쟁이 정말 치열했습니다. 뉴스는 단 한 초라도 먼저 나가는 것이 중요했어요. 분장도 못 하고 바로 방송에 들어가야 했고,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를 가장 많이 말한 앵커 중 한 명이었을 겁니다.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24시간 내내 속보를 진행했습니다.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고, 단 한 명이라도 생존 소식을 전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방송에 임했어요. 지금도 큰 사건·사고 뉴스를 방송으로 접할 때 갑자기 온몸으로 반응하거나, 아무런 원고 없이 뉴스를 진행하는 아찔한 순간을 꿈꾸는 것을 보면 ‘천상 방송기자’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 특파원 시절의 경험도 인상 깊을 것 같습니다.“유럽 특파원으로 갔을 때 정말 사건이 많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다음 날 바로 가습기 사건 살균제 사건 피해자 취재를 나가며 특파원 생활이 시작됐죠. 이후 브렉시트, 니스 테러, 샹젤리제 거리 총격, 베를린 크리스마스 마켓 테러 등 여러 사건을 사건·사고를 연이어 취재했습니다.특파원의 기본은 어떻게든 현장에 있는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전쟁과 다를 바 없죠. 한 달에 8시 리포트를 20번 넘게 한 적도 있습니다. 밤에 혼자 숙소로 돌아오면 정말 힘들었어요. 게다가 파리에 처음 갔을 때는 한 달 가까이 비만 내렸습니다. 센강 수위가 올라 루브르 박물관이 폐쇄됐고, 제 첫 리포트도 장화를 신고 센강에 들어가서 전한 홍수 보도였습니다.”- 기자 생활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뉴스를 전하던 순간도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참 행복했어요. 나이트라인 마지막 방송 날이었습니다. 밤 12시 반에 뉴스를 시작해 1시 10분 클로징 멘트를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왔는데, 15명의 후배가 서 있더군요. 미디어월 뒤편을 제가 여태까지 만난 분들로 채워주고 마지막을 함께 축하해줬어요. 미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비한 깜짝 서프라이즈였어요.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 직업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송기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순간을 언제 또 경험할 수 있었을까 싶었죠. 낮과 밤이 뒤바뀌는 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때의 고단함마저도 모두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저는 주저 없이 방송기자의 길을 선택할 겁니다.”- 기자 생활을 하며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역량은 무엇인가요?“방송기자의 처음과 끝은 인터뷰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마음을 열고 말하게 만드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카메라가 많고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배려해야 합니다. 또한 방송기자는 결국 공감 능력이 핵심입니다. 아이컨택을 잘 하고, 추임새를 잘 넣고, 상대를 존중하고, 함께 호흡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런 태도는 방송 현장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드러납니다. 길에서 쓰레기를 줍거나, 문을 잡아주는 작은 행동들이 결국 사람을 드러냅니다.”- 방송기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요즘 후배들에게는 최대한 많은 걸 해보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언론사에 들어오면 기존의 것을 비우고 다시 배우는 구조였다면, 지금은 다릅니다. 운동이든 음악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해보세요. 그 모든 경험이 자산이 됩니다.요즘은 기자 한 줄, 한 마디가 바로 검증됩니다. 그래서 전문성이 더욱 중요해졌어요.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비판의식, 책임의식, 소명의식은 기본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인성입니다. 방송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카메라, 편집, 그래픽, 제작진 모두와 함께 만드는 종합예술이죠. 결국 조직에서 오래, 잘 가는 사람은 인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 정년퇴직 이후에는 멘토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십니다.“정년퇴직 이후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하던 중, 한국장학재단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방송기자를 꿈꾸는 후배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제 삶의 경험을 나누는 일이 생각보다 큰 기쁨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그 경험을 계기로 교회에서도 ‘신촌 멘토링 스쿨’이라는 청년 멘토링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IT, 의료, 인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장년층 멘토와 청년 멘티를 연결하는 구조인데, 무엇보다 공감과 감사, 배려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습니다.멘토링은 가르치고 이끄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나누는 수평적인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게도 청년 멘티들을 만나고 그들의 고민에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행운입니다. 그렇게 멘티가 다시 누군가의 멘토로 성장하는 선순환이 만들어질 때, 멘토링의 의미는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앞으로의 인생 목표나 가치관이 궁금합니다.“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인성입니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아날로그적인 인성이 더 중요해진다고 생각해요. 35년 동안 후배들을 지켜보며 확신하게 된 부분입니다. 언젠가 뉴스에 다시 초대받는 사람이 된다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초대받고 싶어요. 지금도 후배들과 만나며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결국 선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는 것, 그게 제 인생의 목표입니다.”
20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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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남(의학77) 교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겸 작가환자를 보며 자신을 마주한 성찰의 기록정신분석으로 삶을 읽고, 다시 쓰다김혜남 교우는 모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국립정신병원(현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12년간 정신분석 전문의로 근무했다. 이후 김혜남신경정신과의원 원장으로서 환자들과 만나오면서, 여러 의대에서 외래교수로서 학생들도 가르쳐왔다. 그러던 마흔세 살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며 삶의 큰 전환점을 맞았고, 병마와 싸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등 베스트셀러를 출간하며 독자의 큰 공감을 얻었다. 이번 인터뷰에서 김 교우는 정신분석 전문의와 작가로서, 환자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다시 만나게 된 삶을 담담히 들려준다. 모교 공동체에 대한 애정부터 정신분석을 통해 발견한 삶의 통찰, 그리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태도까지 차분하면서 유머러스하게 풀어놓는다.글. 송다연 기자- 교우님에게 모교가 지니는 의미가 궁금합니다.“모교는 제게 단순한 출신 학교가 아니라, 삶의 정체성에 가까운 공간입니다. 제 남편도 의대 동기이고, 35대, 36대 고대의대 교우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아들은 모교에서 경영학과 박사 학위를 받은 지 1년이 됐고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가족 안에서도 ‘고려대’는 하나의 공동체였죠. 무엇보다 모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내가 졸업한 학교가 제일 좋은 대학이라고 생각하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끈끈한 교우애와 정, 그리고 서로를 챙기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죠. ”- 재학 시절 기억에 남는 경험이 있다면요.“본과 4학년 때 연극반 활동을 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요. 남자 광대 역할을 맡아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했죠. 한 인물의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면서 무대를 뒤집어놨던 경험이 제 인생에 꽤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여러 가지 마음에 깊게 접근하게 됐거든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이렇게 복잡하고 깊다’는 것을 실감하고, 인간의 내면에 더 관심을 두게 된 계기죠.”-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은 무엇이고 처음 이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될까요.“제 안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 마음을 알고 싶었고, 그 과정에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정말 복잡합니다. 자기 마음도 잘 모르는데, 남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 해석을 통해 환자 스스로 알게 하는 과정이죠.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립니다. 일주일에 세네 번, 한 번에 한 시간씩, 보통 3~4년은 함께 가야 해요. 과거의 중요한 경험, 무의식에 남아 있는 기억들이 현재를 어떻게 지배하는지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과정입니다.”-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배움은 무엇인가요.“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이후로 세상이 안개가 걷힌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어요. 영화 속 인물도 다르게 보였고요. 그리고 성공한 사람일수록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보였어요. 병원과 회사를 여러 개 운영하며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도, 마음 한편에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계시더군요.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랑과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든 상관없이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따뜻한 눈빛으로 언제든 기다려주고 반겨주는 존재의 힘은 정말 큽니다.”-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며 가장 크게 느낀 점도 궁금합니다.“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결국 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저는 환자를 ‘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해요. 치료 사례를 놓고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이 정말 뜻깊었고, 그 안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됐죠.인생의 앞길을 헤매다 막다른 길에 닿으면, 그 끝에 큰 거울이 하나 있는 것 같아요. 그 거울 앞에서 결국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죠. ‘나만 외로운 게 아니구나, 인간은 다 비슷하구나’라는 것을요.”- 의사로서 일하시다가 책을 쓰게 된 계기도 궁금합니다.“파킨슨병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 정말 눈앞이 깜깜했어요.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미래가 조금 불확실해지고 현재가 살짝 불편해졌을 뿐, 나 자체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오지도 않은 미래 때문에 왜 현재를 망치고 있지?’ 그 순간, 다시 일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뭐든 열심히 해보려고 했죠.그럼에도 사실 원래 책을 쓸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요. 다만 중학교 시절 수필 시간에 쓴 글 하나가 전교생 앞에서 낭독된 기억은 있어요. 잘 쓴 글은 아니었지만, 진심이 담긴 글에는 힘이 있더라고요. 잘 쓴 글이라는 칭찬까지 받았다면 더 좋았겠지만요.(웃음) 제가 글을 엄청 잘 쓴다기보다는, 진심을 담아서 써 내려간 글이라서 여러 책까지 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힘들 때 다시 일으켜 세우는 행동과 생각은 무엇인가요?“저도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좌절합니다. 책에선 긍정적인 태도를 이야기했지만, 저조차도 잘 까먹는 거죠.(웃음) 그럴 때마다 무용과 심리학을 함께 공부했던 친한 친구를 만나요. 함께 시간을 보내며 꽃과 풀을 보고, 물방울이나 빛의 변화를 바라봅니다. 이렇게 사소한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이 큰 위로가 됩니다. 거창한 깨달음보다,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저를 다시 살아가게 해줘요.그리고 후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 삶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 있기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후회되는 선택’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 선택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고, 결국 긍정적인 영향을 줬으니까요. 인간은 실수를 통해 배우는 존재고요. 시부모님을 모시며 아이 둘을 키우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가 제가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예요.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었지만,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었고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다시 돌아가면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살았을걸’하는 후회보다는, 그 시절로 돌아가도 저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요?“‘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느 날 문득 마음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앞으로 제가 할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몸으로 뛰지는 못해도,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저도 보통 사람이거든요. 나만 고통 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남들도 저도 다 똑같이 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매 순간을 즐겁게,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친구를 만나면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버스킹을 보면 환호하고 박수도 치고요. 제주도, 특히 함덕 바다를 걷는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마지막으로 모교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경쟁이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고 지루한 시간이 오히려 행복일 수 있습니다. 고통 속에 있더라도, ‘사랑한다’며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행복입니다. 자신을 잘 돌보고, 단 한 사람이라도 나로 인해 웃을 수 있다면 충분해요. 웃고 있으면,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니까요. 잘 견디고, 잘 행복했으면 합니다.”
202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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