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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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가 파괴해 버린 일상, 그 단절과 고립 위에 남은 폐허를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 고민을 시작할 때다.팬데믹 위기가 차츰 진정세로 접어들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취미와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소모임의 부활이다. 동아리를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대학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조망해 본다.
HOT CONTENTS
2년간 잠시 쉬어간 동아리, 재도약 준비하며 꿈틀
서울·부산·대구 등 주요 광역단체 5곳, 기초단체는 24곳 … 전국에 퍼진 호랑이들의 포효
세대와 문화, 가치관 차이 뛰어넘어 평생 인연으로 하나되게 만드는 힘
INTERVIEW
고려대학교를 기록하다[6] 여자교우회 창립주역 최찬희 교우 최찬희(법학51) 교우회 고문은 고대여자교우회 초대 회장이다. 1967년 석란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여자교우회는 지금은 10만 여교우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최 교우는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입학시험을 치르고 모교에 입학했다. 정법대 법률학과 51학번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아버지는 강원도 양양의 독립운동가였어요. 제가 경기여고 4학년일 때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서울대는 일본인이 세운 학교, 연세대는 서양인이 세운 학교, 고려대는 우리 민족이 합심해 세운 학교라고 하셨어요. 부산 초량동 경남여고에서 입학시험을 쳤는데 합격하고 보니까 고려대는 대구에 있더라구요.”대구 임시교사에서 대학생활 시작선친은 최인식 독립유공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의해, 광복 후엔 고향이 소련점령지가 되면서 소련군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 최 교우는 선친이 겪는 고초를 보면서 법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모교 진학을 위해 대구 친구집에 갔더니 이미 피란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근 성당에 들어가 실컷 울고나서 무작정 경찰서를 찾아갔다. 서장을 만나 가정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주었다. 선친과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3·1운동 민족대표 이갑성 씨에게 연락했고 그를 통해 원대동에 공장이 있던 삼호방직 정재호 사장을 만났다. 토요일마다 가서 통역과 장부정리 등의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았다. 어렵게 돈을 모아 부산에서 어머니를 모셔왔고, 유진오 총장의 옆집에 방을 얻었다.“유진오 총장님이 무척 반가워하셨어요. 모든 선생님이 여학생들을 아껴주셨어요. 1학년 때는 철학개론, 문학개론, 심리학개론 같은 교양수업이 많았는데 선생님들이 명강 경쟁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가르치셨어요. 남학생들이 강의실 앞자리 가운데에 제가 앉을 자리를 늘 비워뒀어요.” 호칭은 ‘미스 최, 미스터 김’ 혹은 ‘아무개 씨’라고 불렀고 서로 존댓말을 썼다. 경기여고 시절 담임이었던 조지훈 선생 권유로 고대신문 기자가 됐다. 1952년 3월 11일자 고대신문 ‘어머님께 올리는 글’에서 최 교우는 남성문화가 강한 학교이지만 “그 가운데서 좀 더 강력한 향상의 열이 고취된다”고 썼다. 여자후배들이 늘어나자 최 교우는 1953년 5월 30일 ‘고대여학생환영회’를 열었다.“총장실로 찾아가서 부채과자하고 음료수라도 살 돈을 달라고 떼를 썼어요. 정난숙(경제51)이 사회를 보고 내가 우리는 민족학교다 뭐다 하면서 환영사를 했어요.”이 환영회를 계기로 모교에 여학생회가 조직된 셈이다. 서울로 돌아온 후 1954년 7월 최초의 여학생 전용공간인 금란실(金蘭室)이 생겼다. 처음엔 ‘금남의 집’이라 불렀는데 이상은 선생이 이름을 지어줬다. 여성 권익향상 위해 힘써온 세월1954년 10월 30일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제4회 아남민국 모의국회’에서 최 교우는 최초의 여자부의장을 맡았다. 최 교우가 의장을 맡아 오후 의사일정을 진행하는 모습은 당시 고대신문은 물론 여러 일간지 보도가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이날 서울대 문리대 대표로 온 박필재 씨(당시 서울대 학보사 편집장)는 나중에 최 교우와 부부가 되었다.최 교우는 졸업 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노동법 석사학위를 받았고 노총 자문위원, 국회법령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여성노동자 권익향상을 위해 애썼다. 대구 원대동 시절 방직공장에 나갈 때 여공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권익신장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최 교우는 여자교우회를 조직하고 곧바로 장학회를 만든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1970년 8월 5일자 교우회보 창간호에 게재한 ‘석란회 발족기’에서 최 교우는 “뜻 있는 모임에 뜻 있는 사업이 있어야겠기에 가장 먼저 장학금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이후 교우회장 선거 등 갈등이 있을 때 여자교우인 자신이 나서 중재를 했던 일도 많았다고 한다. 모교를 넘어 우리 사회의 여성권익신장에 기여해온 최 교우는 2011년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상했다. (위 사진부터) 1953년 5월 30일 열린 고대여학생환영회. 최 교우(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환영사를 했다. 앞줄 왼쪽 세 번째부터 정재각, 신기석, 이종우, 김효록, 이상은 교수. 대구 원대동 ‘고려대학교 임시교사’ 시절의 최찬희 교우.1954년 10월 30일 열린 제4회 아남민국 모의국회에서 의사일정을 진행하는 최 교우. 재학시절 내내 양갈래로 땋은 머리였던 최 교우는 유진오 총장의 권유로 모의국회 전날 파마를 했다고 한다./ 전용호(국문86) 모교 박물관 특임교수
인터뷰-이채연(교육경영최고위16회)60대에 가수 데뷔 … 많은 이에게 용기되길후진 양성 위한 아낌없는 기부 정신도“이만하면 충분해 이게 나니까할 수 있을 만큼해낸 거겠지”지난달 12일 삼성동 슈피겐홀에서 올해로 66세가 된 가수 이채연의 데뷔 쇼케이스가 시작됐다. ‘오늘 이별’, ‘나에게 너에게’ 두 곡을 선보이며 당당히 가수로서의 시작을 알린 그녀는 현재 연매출 약 500억에 달하는 교육기업의 대표이기도 하다.노래를 잘하고 싶다는 단순한 계기로 발성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녀는 시작하면 끝을 봐야하는 성격이라 직접 녹음한 음원을 발매하고 콘서트까지 개최했다. ‘채연과 친구들의 작은 음악회: 시작’이라는 공연 제목처럼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파티처럼 즐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38년간 몸담은 교육자의 삶이채연 교우는 연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뒤 영동여자고등학교에서의 교사 생활을 거쳐 경북전문대학에서 간호학과 교수로서 재직하며 총 18년간 교육계에 몸담았다.2003년 교육기업 창업에 도전하며 사업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그녀의 나이는 48세였다. 적지 않은 나이에 시작한 사업에 주변인들은 말렸지만 그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교육자로서 일해 왔기에 기존의 경험과 지식을 양분으로 삼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경영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됐다.이 과정에서 그녀는 모교 교육대학원의 교육경영AMP 과정을 수료하며 폭넓은 경영 지식을 습득하기도 했다. 20여 년 동안 경영을 이어온 그녀는 현재 전국에 30여 개의 직영점을 운영할 정도로 성장한 기업의 대표이다. 남다른 기부 철학모교 운초우선교육관 407호 명패에는 ‘이채연 강의실’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작년에 설치된 이 명패는 2017년부터 이어진 그녀의 기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저는 통장에 모아놓은 돈이 제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쓴 돈만이 제 돈이죠.”‘기부는 습관’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올해도 모교 사범대에 1억을 약정하며 교육자상을 제정했다. 그녀의 호를 따라 ‘청해교육자상’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상은 미래의 훌륭한 교육자 양성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모교에서 대학원을 수료하며 고대만의 끈끈한 정을 느꼈다는 이채연 대표의 모교 사랑이 드러난다. 지난달 열린 사범대 50주년 행사에서 감사패를 수상하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청소년육성회, 타 대학 등 사회의 다양한 곳에 장학금 기부를 아끼지 않는 그녀의 행보는 가치 있는 곳에 쓸 물질을 아끼지 않겠다는 그녀의 철학을 여실히 드러낸다.배움과 도전은 끝나지 않는다“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며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채연 대표는 최근에도 인터넷 강좌를 이용해 금융과 투자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누구나 배움을 통해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며 “인생은 도전의 역사”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최근 음원을 발매하고 콘서트를 연 까닭도 비슷한 맥락이다. 본래 2020년에 계획했던 콘서트를 코로나 상황 때문에 미루면서 그동안 더 열심히 콘서트를 준비할 수 있었다는 이채연 교우는 올해 성공적으로 가수라는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다.“나 같은 사람도 콘서트를 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이번에 발매한 음원 중 하나인 ‘나에게 너에게’라는 노래는 특히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위안을 주는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 교육자, 사업자의 신분을 벗고 그저 재미있게 인생을 살아나가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봐달라는 이채연 교우의 진심이 담겨있는 듯하다.“그만하면 괜찮아그게 너니까이만해서 이만한 게고마울 뿐야” 지난달에 열린 '채연과 친구들의 작은 음악회'.이희영 기자
국어·언어논리 콘텐츠 제작자 이해황(물리치료06) 교우 맨땅에 헤딩하듯시작한 수험서 저술,입소문 타고수험생 신뢰 한몸에모두가 차별 없이공부할 수 있도록저술·강의 활동 하고파약 20년간 수험생들과 동고동락하며 수능 국어, 공직적격성평가(PSAT), 법학적성시험(LEET) 수험서를 써내고 강의 활동을 펼쳐온 이해황 교우. 이미 대입 및 고시 수험가에서는 학생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어 온 언어 강사다. 특히 얼어붙은 취업시장에 공무원 시험이나 로스쿨 진학을 위해 뛰어든 모교 후배들 사이에서도 꽤 큰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 어떤 수험생이든 수험생 부모든 누구나 궁금해 할 질문, “국어, 언어 과목은 어떻게 해야 점수가 오르나요?” 이 궁금증의 가장 모범적인 답변을 자신의 저서를 통해 널리 알리고 있는 이 교우를 부산에서 만났다.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교우님들 반갑습니다. 저는 수능 국어, PSAT, LEET 수험서 저자이자 강사인 이해황입니다. 국어, 특히 언어논리와 관련해 책을 집필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고 있고, 유튜브를 통해 영상 강의도 진행하고 있습니다.국어 수험서를 저술하게 된 계기는저는 모교에 입학할 때 3수를 했습니다. 특히 국어 과목에 굉장히 취약했었는데, 제 나름대로의 공부 방법을 축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독학으로 모든 과목의 입시를 준비하다보니 너무나 큰 시행착오를 겪었기에, 이 과정을 책으로 남겨두면 입시를 위해 독학을 하는 어떤 학생에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모교 1학년 재학 때부터 수험서 집필을 시작하셨다고제가 모교 입학 후 여러 과외와 강의 활동을 많이 했었는데, 여러 국어 수험서를 읽다보니 납득되지 않는 결함들을 더러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저술한 《국어의 기술》이라는 책의 원고를 들고 출판사에 직접 찾아가 출판을 요청했습니다. 당연히 전공생도 아니었고 대학 새내기가 쓴 책을 아무 출판사에서도 거들떠보지 않았었죠. 서울대 출신이 아니거나 국어 전공자가 아니면 아예 책을 내주지 않는 곳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구청에 찾아가 등록비를 내고 ‘문통학(문제를 통한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출판사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책은 고대앞삼거리 부근에 있었던 ‘프린트매니아’라는 인쇄소에서 30부씩 정도로 제본해 소규모로 판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입소문이 나고 출판 부수가 늘어나 1년 반 동안 약 1만 5000부를 찍었습니다. 그게 제 저술 활동의 시작이었죠. 재학 당시 어떤 학생이었는지요?모교 입학 후에도 너무나 치열하게 바빴던 것 같습니다. 전공수업을 듣고 곧장 과외를 하러 달려가 학자금을 벌었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수험서를 집필했습니다. 사실 3수를 했던 수험생 때도 저는 과외를 했었습니다. 빠듯했던 형편을 생각하면 제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더라도 경제력을 갖춰야 했었습니다. 그래도 저의 모교 재학 중 가장 행복한 기억은 친구들과 함께 했던 새내기 시절의 합창부 활동이었습니다. 학기 중이든 방학이든 과외와 학업으로 정신없었던 저에게 1년 남짓의 합창 경험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대도 주저 없이 합창부에 가입해 활동하고 싶습니다.학과를 수석 졸업하셨습니다원래는 물리치료학 관련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고, 전공 공부도 굉장히 열심히 했었습니다. 방학만 되면 중앙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다음 학기 전공 수업을 예습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진로에 대한 고민도 깊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제가 쓴 수험서가 꽤 좋은 호응을 얻었었고 판매량도 준수해서 수험 쪽으로 일을 해보는 것도 함께 고려했었습니다. 이 시점에 제가 했던 선택을 통해 지금 수험생들을 위해 일하고 있어 만족스럽습니다.앞으로의 활동 계획은현재 생각 중인 것은, 수험생이 아니더라도 일반인이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기초 논리학 강의를 제작해보려 합니다. 일상 속에서 간단하게 써먹을 수 있는 언어논리를 가벼운 강의를 통해 전달하고 싶습니다. 또 최근 첫 행정고시 시각장애인 합격자이신 강민영 씨의 합격 수기에 제 교재가 언급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도 나름 독학을 위한 교재를 쓰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단 한 번도 신체장애를 가진 수험생이 제 책을 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장애를 가졌든 아니든 모두가 ‘독학’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점자 수험서 출판과 청각 장애인을 위한 강의자막 제작을 통해 제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학생들을 위해 일하고자 합니다. 이해황 교우는…대표 저서 《국어의 기술》, 《논리퀴즈매뉴얼》, 《강화약화매뉴얼》 오르비클래스 국어 인강 강사, 국민의힘 공직후보자자격시험(PPAT) 자료해석, 상황판단 강사, ‘국어의 기술’ 유튜브 채널 운영박형규 기자
교우회장, 지역교우회 찾아 후보 격려
융복합 지식 갖춘 우수 행정인의 산실로 성장 중
샘솟는 열정과 아이디어로 연극계 중심에 서다
다시 찾은 일상, 함께 찾는 문화예술
6·29선언과 가화다방
천신일 전 교우회장 모교에 석조유물 기증
교우회, 재학생 대상 특별 이벤트
문과대교우회, 자랑스러운 문과대학인상 시상
법조인교우회 정기총회
공과대학교우회 정기총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신임 고우체육회장에 정몽원 교우
AMP교우회 경영대상 시상식
인천교우회장에 우윤식 교우 선출
축구연합회 리그 결승
77동기회 미래테크포럼 개최
81학번 동기회 전체 산행
정학현 교우, 의료원에 2억 기부
민남규 교우, 구로병원에 1억 전달
윤영연 교우, 경영대에 1억 기탁
문황호·최경자 교우, 의학발전기금 백만달러 쾌척
메타사회 대학포럼 개막
사범대 50주년 및 미래교육연구원 창립 심포지움
행정학과교우회 고대행정의 날 행사 개최
고대여성포럼 어울림 산책
제4차 고려대학교회 야유회
건축사회환경공학부 호연제
[자명고] 고대 속 의대 50주년, 의대 100주년을 바라보며
김성인 교수 서예 작품 기증
경영대 설립 120주년 기념물 제막
실록소설로 재탄생한 굴곡의 현대사
획마다 자국이 묻어나는 서정적 순간의 묘사
6월호 신간안내
새 정부 첫 걸음 이끌어 갈 교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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