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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철(사학83) 편집위원문화재청 문화재위원대학에 입학해서 갓 상경한 촌놈 새내기에게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 기숙사는 멋진 신세계였다. 3인 1실의 이층 침대에, 수십 명이 함께 쓰는 공용 샤워실과 화장실이 지금 기준으로는 군대 내무반에 가까울지 몰라도, 80년대 초반의 현실에서는 거의 주거 혁명이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안타까운 희생자가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시절, 안전한 서구식 기숙사에 자식을 맡겨놓고 내려가시던 부모님은 든든하고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 날마다 11시 이전에 돌아와 점호를(그렇다, 군대에서나 쓰는 점호라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쓰이던 시대였다) 받아야 했고, 시간 내에 귀사(歸舍)가 불가능할 경우 일일이 외박 신고를 해야 했던 번거로움도 쾌적한 주거 환경에 비하면 문제 삼을 것도 아니었다. 해마다 한두 차례 특식이 제공되는 날은 식사 시간이 되기 전부터 기숙사 식당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소불고기가 제공되었던 기억이다. 지금은 불고기가 뭐 그리 대단한 메뉴도 못되지만, 고기는 으레 국을 끓여 먹는 식재료였던 그 당시에는 구워 먹는 돼지고기 삼겹살도 ‘로스구이’라는 우아한 명칭을 부여받았던 때였다. 그마저도 학생들이 쉽게 접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무려 쇠고기 불고기였다. 그 특식을 먹기 위해서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는데, 강당에 모여서 특식을 제공하신 분의 특강을 들어야 했다. 그 분은 김원기(정치45) 선배, 내가 만난 첫 교우회장이었다.그때 회장님의 구체적인 강연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염불보다는 잿밥이라고, 어서 빨리 연설을 마치면 맛난 불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끊임없이 어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던 말씀만은 뚜렷이 생각이 난다. 너무나 당연한 공자님 말씀 같아서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게을리한 어학 탓에 인생의 고비 고비에서 덜미를 잡힐 때마다 그 말씀이 불현듯 아프게 떠올랐다. 선배님이 후배들에게 먹이시려던 것은 사실 불고기만이 아니었을 것인데, 어리석은 후배는 마음의 양식보다는 몸의 양식에 더 급급했다. 그렇게 40년 가까이 아파하면서 시간이 흘렀다.승명호 회장이 제34대 교우회장으로 지난 3월 새로이 취임하였다. 빛나는 영광의 자리만은 아니기에, 여러 차례 고사 끝에 겨우 승낙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한창 기업을 이끄는 처지에서 끊임없는 희생과 봉사가 요구되는 이 자리가 성가실 수도 있을 것이다. 폭넓고 긴밀한 네트워킹으로 교우들에 힘이 되는 교우회, 사회에 봉사하고 힘이 되는 교우회, 모교와 하나 되는 교우회를 내건 신임 회장의 건승을 빈다. 무엇보다도 언론사 사주답게 격의 없이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40년이 지나도 고대 가족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회장이면 좋겠다.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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