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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를 기록하다[6] 여자교우회 창립주역 최찬희 교우 최찬희(법학51) 교우회 고문은 고대여자교우회 초대 회장이다. 1967년 석란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여자교우회는 지금은 10만 여교우를 아우르는 조직으로 성장했다. 최 교우는 피란지였던 부산에서 입학시험을 치르고 모교에 입학했다. 정법대 법률학과 51학번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아버지는 강원도 양양의 독립운동가였어요. 제가 경기여고 4학년일 때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서울대는 일본인이 세운 학교, 연세대는 서양인이 세운 학교, 고려대는 우리 민족이 합심해 세운 학교라고 하셨어요. 부산 초량동 경남여고에서 입학시험을 쳤는데 합격하고 보니까 고려대는 대구에 있더라구요.”대구 임시교사에서 대학생활 시작선친은 최인식 독립유공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의해, 광복 후엔 고향이 소련점령지가 되면서 소련군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 최 교우는 선친이 겪는 고초를 보면서 법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모교 진학을 위해 대구 친구집에 갔더니 이미 피란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근 성당에 들어가 실컷 울고나서 무작정 경찰서를 찾아갔다. 서장을 만나 가정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받아주었다. 선친과 독립운동을 함께했던 3·1운동 민족대표 이갑성 씨에게 연락했고 그를 통해 원대동에 공장이 있던 삼호방직 정재호 사장을 만났다. 토요일마다 가서 통역과 장부정리 등의 일을 하고 월급을 받았다. 어렵게 돈을 모아 부산에서 어머니를 모셔왔고, 유진오 총장의 옆집에 방을 얻었다.“유진오 총장님이 무척 반가워하셨어요. 모든 선생님이 여학생들을 아껴주셨어요. 1학년 때는 철학개론, 문학개론, 심리학개론 같은 교양수업이 많았는데 선생님들이 명강 경쟁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가르치셨어요. 남학생들이 강의실 앞자리 가운데에 제가 앉을 자리를 늘 비워뒀어요.” 호칭은 ‘미스 최, 미스터 김’ 혹은 ‘아무개 씨’라고 불렀고 서로 존댓말을 썼다. 경기여고 시절 담임이었던 조지훈 선생 권유로 고대신문 기자가 됐다. 1952년 3월 11일자 고대신문 ‘어머님께 올리는 글’에서 최 교우는 남성문화가 강한 학교이지만 “그 가운데서 좀 더 강력한 향상의 열이 고취된다”고 썼다. 여자후배들이 늘어나자 최 교우는 1953년 5월 30일 ‘고대여학생환영회’를 열었다.“총장실로 찾아가서 부채과자하고 음료수라도 살 돈을 달라고 떼를 썼어요. 정난숙(경제51)이 사회를 보고 내가 우리는 민족학교다 뭐다 하면서 환영사를 했어요.”이 환영회를 계기로 모교에 여학생회가 조직된 셈이다. 서울로 돌아온 후 1954년 7월 최초의 여학생 전용공간인 금란실(金蘭室)이 생겼다. 처음엔 ‘금남의 집’이라 불렀는데 이상은 선생이 이름을 지어줬다. 여성 권익향상 위해 힘써온 세월1954년 10월 30일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제4회 아남민국 모의국회’에서 최 교우는 최초의 여자부의장을 맡았다. 최 교우가 의장을 맡아 오후 의사일정을 진행하는 모습은 당시 고대신문은 물론 여러 일간지 보도가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이날 서울대 문리대 대표로 온 박필재 씨(당시 서울대 학보사 편집장)는 나중에 최 교우와 부부가 되었다.최 교우는 졸업 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노동법 석사학위를 받았고 노총 자문위원, 국회법령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여성노동자 권익향상을 위해 애썼다. 대구 원대동 시절 방직공장에 나갈 때 여공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권익신장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최 교우는 여자교우회를 조직하고 곧바로 장학회를 만든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1970년 8월 5일자 교우회보 창간호에 게재한 ‘석란회 발족기’에서 최 교우는 “뜻 있는 모임에 뜻 있는 사업이 있어야겠기에 가장 먼저 장학금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이후 교우회장 선거 등 갈등이 있을 때 여자교우인 자신이 나서 중재를 했던 일도 많았다고 한다. 모교를 넘어 우리 사회의 여성권익신장에 기여해온 최 교우는 2011년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상했다. (위 사진부터) 1953년 5월 30일 열린 고대여학생환영회. 최 교우(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환영사를 했다. 앞줄 왼쪽 세 번째부터 정재각, 신기석, 이종우, 김효록, 이상은 교수. 대구 원대동 ‘고려대학교 임시교사’ 시절의 최찬희 교우.1954년 10월 30일 열린 제4회 아남민국 모의국회에서 의사일정을 진행하는 최 교우. 재학시절 내내 양갈래로 땋은 머리였던 최 교우는 유진오 총장의 권유로 모의국회 전날 파마를 했다고 한다./ 전용호(국문86) 모교 박물관 특임교수
20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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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언어논리 콘텐츠 제작자 이해황(물리치료06) 교우 맨땅에 헤딩하듯시작한 수험서 저술,입소문 타고수험생 신뢰 한몸에모두가 차별 없이공부할 수 있도록저술·강의 활동 하고파약 20년간 수험생들과 동고동락하며 수능 국어, 공직적격성평가(PSAT), 법학적성시험(LEET) 수험서를 써내고 강의 활동을 펼쳐온 이해황 교우. 이미 대입 및 고시 수험가에서는 학생들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어 온 언어 강사다. 특히 얼어붙은 취업시장에 공무원 시험이나 로스쿨 진학을 위해 뛰어든 모교 후배들 사이에서도 꽤 큰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다. 어떤 수험생이든 수험생 부모든 누구나 궁금해 할 질문, “국어, 언어 과목은 어떻게 해야 점수가 오르나요?” 이 궁금증의 가장 모범적인 답변을 자신의 저서를 통해 널리 알리고 있는 이 교우를 부산에서 만났다.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교우님들 반갑습니다. 저는 수능 국어, PSAT, LEET 수험서 저자이자 강사인 이해황입니다. 국어, 특히 언어논리와 관련해 책을 집필하는 것을 주업으로 하고 있고, 유튜브를 통해 영상 강의도 진행하고 있습니다.국어 수험서를 저술하게 된 계기는저는 모교에 입학할 때 3수를 했습니다. 특히 국어 과목에 굉장히 취약했었는데, 제 나름대로의 공부 방법을 축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독학으로 모든 과목의 입시를 준비하다보니 너무나 큰 시행착오를 겪었기에, 이 과정을 책으로 남겨두면 입시를 위해 독학을 하는 어떤 학생에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모교 1학년 재학 때부터 수험서 집필을 시작하셨다고제가 모교 입학 후 여러 과외와 강의 활동을 많이 했었는데, 여러 국어 수험서를 읽다보니 납득되지 않는 결함들을 더러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저술한 《국어의 기술》이라는 책의 원고를 들고 출판사에 직접 찾아가 출판을 요청했습니다. 당연히 전공생도 아니었고 대학 새내기가 쓴 책을 아무 출판사에서도 거들떠보지 않았었죠. 서울대 출신이 아니거나 국어 전공자가 아니면 아예 책을 내주지 않는 곳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구청에 찾아가 등록비를 내고 ‘문통학(문제를 통한 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출판사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책은 고대앞삼거리 부근에 있었던 ‘프린트매니아’라는 인쇄소에서 30부씩 정도로 제본해 소규모로 판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입소문이 나고 출판 부수가 늘어나 1년 반 동안 약 1만 5000부를 찍었습니다. 그게 제 저술 활동의 시작이었죠. 재학 당시 어떤 학생이었는지요?모교 입학 후에도 너무나 치열하게 바빴던 것 같습니다. 전공수업을 듣고 곧장 과외를 하러 달려가 학자금을 벌었고, 밤을 꼬박 새워가며 수험서를 집필했습니다. 사실 3수를 했던 수험생 때도 저는 과외를 했었습니다. 빠듯했던 형편을 생각하면 제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더라도 경제력을 갖춰야 했었습니다. 그래도 저의 모교 재학 중 가장 행복한 기억은 친구들과 함께 했던 새내기 시절의 합창부 활동이었습니다. 학기 중이든 방학이든 과외와 학업으로 정신없었던 저에게 1년 남짓의 합창 경험은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대도 주저 없이 합창부에 가입해 활동하고 싶습니다.학과를 수석 졸업하셨습니다원래는 물리치료학 관련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고, 전공 공부도 굉장히 열심히 했었습니다. 방학만 되면 중앙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다음 학기 전공 수업을 예습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진로에 대한 고민도 깊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제가 쓴 수험서가 꽤 좋은 호응을 얻었었고 판매량도 준수해서 수험 쪽으로 일을 해보는 것도 함께 고려했었습니다. 이 시점에 제가 했던 선택을 통해 지금 수험생들을 위해 일하고 있어 만족스럽습니다.앞으로의 활동 계획은현재 생각 중인 것은, 수험생이 아니더라도 일반인이 재미있게 배울 수 있는 기초 논리학 강의를 제작해보려 합니다. 일상 속에서 간단하게 써먹을 수 있는 언어논리를 가벼운 강의를 통해 전달하고 싶습니다. 또 최근 첫 행정고시 시각장애인 합격자이신 강민영 씨의 합격 수기에 제 교재가 언급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도 나름 독학을 위한 교재를 쓰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단 한 번도 신체장애를 가진 수험생이 제 책을 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장애를 가졌든 아니든 모두가 ‘독학’할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점자 수험서 출판과 청각 장애인을 위한 강의자막 제작을 통해 제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학생들을 위해 일하고자 합니다. 이해황 교우는…대표 저서 《국어의 기술》, 《논리퀴즈매뉴얼》, 《강화약화매뉴얼》 오르비클래스 국어 인강 강사, 국민의힘 공직후보자자격시험(PPAT) 자료해석, 상황판단 강사, ‘국어의 기술’ 유튜브 채널 운영박형규 기자
2022-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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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어노문학과 교수 허승철(노문77) KRD 사무국장 한-우크라 교류 증진에 기여
고려인 문제 해결에도 나서 우크라 출신 유학생에 도움 절실 우크라이나 사태라는 전세계적 현안을 두고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의 백가쟁명 식의 해설들이 매체를 뒤덮고 있다. 복잡다단한 국제 정세를 진단하기에 앞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현재의 국면을 맞닥뜨리기까지 근본적인 역사·문화적 배경을 짚어보기 위해 모교 노어노문학과 허승철 교수를 만났다. 허 교수는 러시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CIS 지역문화에 정통한 학자이면서, 주 우크라이나 대사와 한러대화(KRD) 사무국장을 역임하며 실전 경험까지 두루 갖춘 국내에서 손꼽히는 지역 전문가다. 자유로운 기질의 국민성강대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중추’로 일컬어지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두 달여 넘게 우크라이나가 보여주는 결사항전의 사투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허 교수는 그 이유를 지리적 환경에서 기인한 정치체제와 국민성의 차이로 설명한다. “키이우 공국에서 출발해 같은 슬라브 문화권에 속하지만 혹독한 기후로 인해 강력한 농노제가 지속돼왔던 러시아와 달리, ‘유럽의 빵바구니’라고 불릴 정도로 비옥한 흑토 지대에 자리잡은 우크라이나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기질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농노제에 반대해 탈출한 전사 집단인 코자크의 후예인데, 이들은 민주적인 지도자 선출 방식으로 부정선거나 독재를 용납하지 않는 정치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코자크 전통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항전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교-우크라이나 대학 학술 교류이같은 우크라이나의 정치사회적 특수성에 기반해 시류를 통찰해내고 있는 허 교수는 2002년 한국우크라이나학회를 결성해 회장을 맡으며 우크라이나 연구의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양국의 교류를 확대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서 왔다. 그간 10여 권이 넘는 우크라이나 관련 저술, 번역서를 출간했고, 올해 세 권의 저서를 추가로 낼 예정이다.그는 1997년 IMF 위기 속에서도 홍일식 총장을 설득해 국내 대학 최초로 키이우 국립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1999년에는 모교 출판부와 민족문화연구원에 요청해 100여 권이 넘는 한국학 도서를 이곳에 기증하기도 했다. 모교 러시아-CIS 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2006년에 허 교수는 주 우크라이나 대사로 부임하며 우크라이나 대학과의 학술 교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지속적인 학문적 가교로서 한국학 센터를 개관하는데 큰 힘을 보탰고, 교민 자녀들을 위한 한글학교 설립도 성공으로 이끌었다. 같은 해 한국을 국빈 방문한 유센코 대통령은 모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교우가 됐다. 2008년에는 키이우 외국어대학, 공과대학, 국립농과대학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며 지금까지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교에서 수학해오고 있다. 조지훈 동상 건립 등 문화 교류이 외에도 주 우크라이나 대사 재직 당시 LG, 삼성 등 기업들의 후원을 이끌어내며 문화예술 분야의 교류 또한 적극적으로 활성화시켰다. 대사관이 주관해 시낭송 대회, 바둑 대회, 태권도 대회등을 개최하고, 2007년 열린 아시아 영화제에 한국 영화들을 소개하는 등 우크라이나 사회에 K-콘텐츠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 허 교수는 양국의 문화 교류 증진을 위해 키이우 국립대학 식물원 공원 내에 ‘한국 시인 정원’을 추진하고 있다. 2019년 한국 문인으론 최초로 김소월 기념비가 세워진 데 이어 현재는 조지훈 동상 건립이 진행 중이다. 당초 허 교수는 최동호(국문66) 모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와 함께 2020년 조지훈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제막식을 기획했으나, 안타깝게도 코로나 상황에 이어 전쟁까지 닥치며 초벌구이까지 마친 흉상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고려인 후손에 모교 수학 기회 무엇보다 그의 주요한 업적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 내 고려인 문제 해결이다. 당시 심각한 국제 이슈였던 불법 체류 상태의 고려인 동포들의 법적 지위 회복을 위해 우크라이나 정부의 적극적 협조를 이끌어냈고 그 결과 현재까지 1000여 명 이상이 합법적 체류 지위를 얻게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나아가 경제적 지원과 한국어 및 한국문화 전승에도 앞장서 왔다. 허 교수는 모교가 1997년 ‘한민족 후손 장학생’ 제도를 만들어 고려인 학생들이 모교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나 2년 만에 중단됐다며 아쉬움을 전하고, 우리 후손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여건 마련이 시급함을 강조했다. 교우들 도움의 손길 절실이처럼 한-우크라 학생들을 위한 인적 교류에 가장 주력해온 허 교수는 모교에서 수학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학생들에 대한 깊은 우려를 표했다. “현재 재학 중인 8명의 학생들 가운데 한국정부장학생이 아닌 4명은 현지로부터 조력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유학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한 물적, 심적 차원의 지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교우들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더불어 허 교수는 우크라이나 기차역과 교회, 고아원, 그리고 국경 부근에서 피난민을 돌보고 있는 한인 선교사들을 소개하며 이들을 위한 식료품과 생필품, 의약품 및 의료용품 등 구호물품의 후원 또한 촉구했다. 강주형 기자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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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로 충분하다》 저자 이소은(영문01) 교우 ‘서방님’, ‘닮았잖아’ 등을 부른 가수이자 변호사, 국제상업회의소(ICC) 뉴욕지부 부의장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도전해온 이소은 교우는 최근 자전적 에세이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를 출간하고 지난 4월 문과대학에서 북토크를 진행하며 후배들에게 진솔한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모교 재학 시절부터 ‘충분한 지금의 나’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함께 만나보자.여러 직업을 거치며 어려움은 없었나요?어린 나이에 가수 데뷔를 하다 보니 프로의 세계에서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어요.로스쿨에서는 어마어마한 공부량과 치열한 경쟁이 넘어야 할 산이었고, 로펌 생활도 쉽지 않았죠.국제상업회의소에서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협업하다 보니까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많았어요.또 저는 한국에서는 명백한 다수였다가 뉴욕에서는 아시안 여성이라는 소수가 된 거잖아요.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건 아니어도 숨어있는 편견들을 많이 마주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어려움들 덕분에 스스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해요.신간 집필 계기는 무엇인가요?이번 책은 뉴욕의 변호사라는 특수한 직업에 관한 얘기지만 단순히 뉴욕 로펌과 국제기구 생활을 설명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 안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모두 성장에 대해 고민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잖아요. 그 질문에서 제가 찾은 답은 원하는 대로만 사는 게 아니라, 외부의 도전으로부터 깨져가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다듬어 가는 거였어요. 그 일련의 깨달음을 책으로 풀어낸 거죠.최근 문과대학에서 북토크도 진행하셨어요오랜만에 학교에 간 거였는데, 코로나라는 힘든 시간을 겪은 후라 그런지 이상하게 울컥하더라고요. 제가 경험한 대학생활의 재미를 코로나 때문에 느끼지 못한 후배들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고, 어떻게 용기를 줄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어요.그리고 후배들이 도전할 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벌써부터 스스로의 성장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게 대견했고, 저를 비롯한 선배들이 이런 고민들을 나눌 수 있는 장을 많이 마련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재학 시절 기억에 남는 추억은요?너무 많죠. 입실렌티에서 응원도 하면서 초대 가수로 공연도 하고, 뒤풀이에서 밤새 놀다가 아침에 집에 들어간 적도 있어요. 저는 고연전도 열심히 다녔고 참살이길이랑 신촌에서 기차놀이도 엄청 했죠. 대동제는 물론이고, 4·18 구국대장정에도 참여했었어요. 저는 연예계라는 좀 다른 사회에 몸담고 있었지만, 고대 덕에 평범한 생활도 함께 누릴 수 있었던 것 같아서 큰 행운이었어요.교우님께 모교는 어떤 의미인가요?대학 생활은 제 인생의 꽃이었어요. 연예계의 부담감에서 벗어나 너무 즐겁게 지냈죠.또 원래 문학을 좋아했지만, 영문과랑 너무 잘 맞았어요. 요즘 ‘인문학의 위기’라고들 하잖아요. 하지만 제가 연예계, 법조계 생활을 하면서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영문과에서 배웠던 인문학적 소양이거든요. 다른 기술적인 것들은 공부해서 충분히 배울 수 있지만 타인과 관계 맺고 소통하는 능력은 시간을 두고 몸소 터득하고 경험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능력을 저는 문학을 통해 배웠다고 생각해요.기억에 남는 교수님이나 수업도 있으신가요?김양순 교수님의 시 수업이요. 교수님께서는 단순히 시만 설명하시는 게 아니라, 시가 쓰인 사회적 배경들을 함께 설명해주셨거든요. 덕분에 문학이 사회와 동떨어진 게 아니라 적나라하게 사회를 반영하고 변화시키는 하나의 매개체라는 걸 깨달았어요.마지막으로 교우님들께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이번에 한국에 와서 교우들을 많이 만났어요. 방송, 인터뷰, 사인회에서 “사실 저 고대 몇 학번이에요”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같은 공간에서 성장한 사람들을 사회에서 만나니까 굉장히 반가웠고,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어요.그래서 앞으로 그런 기회가 더 많았으면 해요. 이제 제 또래의 사람들이 사회에서 각자의 몫을 해내고 있잖아요. 서로 도와가며 좋은 에너지를 낼 수 있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고 싶어요. 최예슬 기자 지난 3월 15일에 발간된 이 교우의 신간.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영감과 따뜻한 용기를 준다.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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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신계륜(행정74)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지난달 28일 저녁 서울 종로구 소재 ‘라라장터’에서 모교 교가가 울려퍼졌다. 윤이상평화재단(이사장 신계륜)이 주최한 교가음악회에서는 마산고, 경주고, 경상대 등 윤이상 선생이 작곡한 15개 학교의 교가가 남성 성악가 4중창단에 의해 연주됐으며, 모교 교가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윤이상평화재단은 윤이상의 음악과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 평화를 실현하고자 2005년 설립됐다. 재단 창립멤버로 꾸준히 활동해 왔으며 2019년부터 이사장직을 역임하고 있는 신계륜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윤이상평화재단의 사업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윤이상 선생은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를 염원했고, 이러한 사상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분이다. 그래서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에 고초도 많이 겪으셨다. 1972년 뮌헨올림픽 당시 독일 정부는 자국의 작곡가 대신 윤이상 선생에게 개막식에서 연주될 축하곡을 의뢰할 정도였고, 해외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위대한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유독 고국에서만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우리 재단에서는 윤이상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가을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젊은 예술인 중 평화에 이바지한 이에게 격년제로 ‘윤이상평화음악상’을 시상한다. 남북평화교류 사업 또한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교가를 주제로 음악회를 기획한 점이 흥미롭다뛰어난 명곡을 많이 남긴 거장이지만, 무엇보다 모교 고려대학교의 교가를 작곡한 분이 아닌가. 윤이상 선생은 고향인 통영을 비롯해 마산, 부산 등 경남 지역 여러 학교들에도 교가를 작곡해주었다. 해방 후 세워진 학교들 중에 교가가 없는 곳이 많았는데, 학교의 얼과 뜻을 담은 노래들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은?윤이상 선생은 생전에 DMZ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음악제를 열기를 원했다. 그 소원을 이루는 것이 목표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윤이상의 음악이 분단된 민족을 잇는 끈이 될 것이라 믿는다. 또한, 아직까지 한국에는 윤이상의 모든 곡을 정리한 전집이 없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이렇게 홀대 받고 있다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교가를 사랑하는 모교 교우들이 전집 제작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은?윤이상 선생은 생전에 DMZ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음악제를 열기를 원했다. 그 소원을 이루는 것이 목표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윤이상의 음악이 분단된 민족을 잇는 끈이 될 것이라 믿는다. 또한, 아직까지 한국에는 윤이상의 모든 곡을 정리한 전집이 없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가 이렇게 홀대 받고 있다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교가를 사랑하는 모교 교우들이 전집 제작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 김선형 기자
2022-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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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즐리컴퍼니 대표김동욱(경영08) 교우고객 경험 관리팀만 50명 중 26명 …철저한 고객 경험 분석이 성장의 원동력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확인한다. 엊그제 면도했던 수염이 다시금 반긴다. 면도날이 없어 새로 사려고 보니 가격이 발목을 잡는다. 면도날이 지갑도 잘라버릴 듯 하다. 김동욱 교우도 그랬다. 법대후문에서 자취하며 ‘면도기가 너무 비싸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가격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작했던 스타트업이, 지금은 100만 이용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내 최초의 면도기 구독 서비스가 됐다. D2C(Direct to Consumer) 방식으로 가격거품을 없앤 김동욱 교우를 만났다. 합리적인 가격에 고품질 제품까지와이즐리 컴퍼니는 구독경제 중심 스타트업이다. 불필요한 중간 유통 과정을 없애고 소비자들에게 직접 배송한다. 초기에는 김 교우의 작은 생각에서 시작했다. ‘면도기가 비싼 이유는 중간 유통 과정에서 생긴 가격 거품 때문일 것이다’라는 생각에서다. 면도기에서 시작했지만, 현재는 기능성 샴푸, 화장품, 심지어는 영양제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후에는 생리대, 헤어케어 제품까지 사업을 넓힐 예정이다. “와이즐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생필품의 가격 거품을 없애고 더 많은 고객이 현명한 소비를 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입니다”이러한 이유 때문일까, 김 교우는 최근 전 제품의 가격을 43퍼센트 인하하는 강단을 보였다. 소비자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겠다는 취지에서다. 타 브랜드와는 다르게 광고비와 유통비를 절감했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와이즐리의 제품들. 간결한 디자인이 눈에 띈다. 고객 경험이 최우선, 와이즐리의 전략“우리가 받고 싶은 서비스를 만들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합니다. 서비스를 이용하며 마주했던 불쾌한 경험들은 대부분 생산자가 고객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 교우는 고객이 만족할만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격 대비 성능을 우선으로 꼽는다. 모든 제품들을 미국, 독일, 벨기에 등지의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가진 OEM 제조사에서 생산한다. 또한 고객이 제품을 구매하고 자택에서 거치, 사용, 심지어는 버리는 과정까지 세밀하게 분석한다. “이전에 면도 젤의 색이 변하고 거품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CX팀에서 온도에 따른 변질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온장고와 냉장고를 구매해 직접 테스트했습니다.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배송센터에 항온 장치를 설치해 제품이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쉽지만은 않았던 창업 도전기김 교우는 졸업 후 외국계 마케팅 회사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불합리한 유통 구조를 해결하자는 생각에 200명 정도의 고객에게 진행한 사전 테스트를 바탕으로, 김 교우는 어쩌면 무모한 도전을 시작했다. 29살에 퇴사 후 본격적으로 법인을 설립, 스타트업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는 현실과 적은 성장세로 창업 초기에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격을 낮추며 더 많은 사람이 현명한 소비를 했으면 좋겠다는 진솔한 마케팅이 호응을 얻어 성장해올 수 있었다고 한다. “브랜드 스토리로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고객 경험을 중요시했던 저희의 전략이 주요했던 것 같습니다.”도움을 준 끈끈한 모교의 정“어느 날 동기나 선배들에게 갑자기 연락이 옵니다. 자기가 호텔에서 근무하는데 호텔 프로모션 행사에 와이즐리 제품을 넣어주겠다는 것이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스타트업에서는 채용이 중요한데, 뛰어난 인재를 모으는 데 모교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선배 창업자들에게 도움을 얻는 경우에도 모교 선배님들께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김 교우는 모교의 인연을 통해 얻은 다양한 조언이 스타트업의 자양분이라고 말한다.“재학 시절 경영대 기업가정신 학회인 FES 회장으로 활동하며 지도교수이셨던 김익수(경영73) 교수님이나 남대희 교수님께 많은 조언을 얻었습니다.”또한 앞으로 새로운 유통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옛날에는 가족들끼리 대형마트에 장 보러 가며 생활용품을 사곤 했습니다. 현재는 구독 서비스나 온라인으로 구매하는 형태로 바뀌었는데, 와이즐리가 생활용품 부문에서 새로운 소비 습관을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우님들께서도 응원해 주시고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정덕수 기자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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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한인연합회장남종석(노문84) 교우폴란드 한인회 중심으로 숙소제공 등 지원 앞장서500여 고려인 동포에 도움 절실불안한 동유럽 정세 속에서 전쟁 난민들을 돕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인 교우가 있다. 바르샤바한인회장 겸 폴란드 한인연합회 초대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남종석 교우가 있었다. SK네트웍스 폴란드 지사장으로 근무하다가 2003년 무역회사 ‘칸(Khan)’을 설립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우리나라 직물 수출에 큰 역할을 해온 사업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한국과 폴란드 간 경제 교류, 중소기업의 동유럽 시장 진출과 청년 해외취업 연계 지원 등 국가경제 발전 및 생산성 향상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0년 제44회 국가생산성대회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현재 세계한인무역협회(OKTA) 명예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한국 기업인들이 전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있는 그는 최근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로 이주한 고려인 난민 지원을 위한 기금 마련 캠페인에도 앞장서고 있다. 세계한인무역협회 공식 행사와 난민돕기 캠페인을 위해 잠시 귀국한 남 교우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난민돕기 기금마련을 위해 제작, 판매하고 있는 티셔츠를 보여주고 있는 남종석 교우.현재 고려인 난민 돕기 활동 상황은?우크라이나 전체 인구 중 고려인 동포는 약 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쟁을 피해 대부분 폴란드로 넘어오는데, 이들을 위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현재 고려인 동포 1200여 명의 명단을 확보했고, 3월 말 현재 35가구 약 150명 정도에게 숙소 제공 등의 도움을 주고 있다. 이주 비용과 임시거처 마련 및 긴급 생필품 지원이 시급하다. 기금 마련을 위해 폴란드 한인회에서 티셔츠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는데, 이번에 화성 신텍스에서 열린 세계한인무역협회 행사에서도 현장판매를 진행해 400만원 정도가 모였다. 모교 교우들의 동참도 이어지고 있다. 현재 문과대교우회를 비롯해 여러 교우 단체들을 통해 티셔츠 구매 신청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또 모교 의료원에서도 의료봉사와 물품 전달 등을 수행하고 돌아갔다. 원활한 봉사활동을 위해 폴란드 한인회에서 통역, 일정 조율 등 실무를 지원하며 협력했다. <관련 기사 6면>추후 계획이나 목표는?우선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숙소, 생필품 같은 기본적인 원조다. 그러나 단순한 금전적 지원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폴란드로 건너온 난민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취업 지원이나 아동보육 프로그램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영역이 많다. 우크라이나에 기반을 둔 고려인 NGO 단체 ‘아사달’, 국내 NGO 단체인 ‘기아대책’ 등 여러 기관과 협력해 다양한 지원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폴란드 한인회 활동에 대해서도 듣고 싶다현재 폴란드 교민 사회는 80퍼센트의 기업 주재원들과 20퍼센트의 이주민으로 구성돼있다. 기본적으로 주재원 중심의 환경이라 그런지 기업과 한인회 사이의 협력 관계가 조화롭게 잘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이 주최하는 세계한인회장대회에서 2021년 ‘자랑스러운 한인회’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한인회가 마스크 무료 배포, 전세 비행기 확보, 백신 접종 지원 등의 활동을 발빠르게 전개했다. 교민들 사이에서 ‘한인회가 일을 제대로 한다’, ‘정말 필요한 존재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 한국의 음식과 주류를 폴란드 사회에 소개하는 이벤트를 여는 등 다양한 문화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교우 사회는 어떤가폴란드에는 대략 15명 정도의 교우가 거주하고 있다. 인원은 많지 않지만 공관, 기업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교우들이다. 정기적으로 모임도 갖고, 이렇게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엔 한인회장 역할을 대신해 도와주기도 하면서 화목하게 잘 지낸다. 해외에 나와 있다 보니 교우라는 끈으로 만나면 더 애틋한 느낌이 들고, 마음이 든든하다.우크라이나 난민 돕기에 앞장서게 된 계기는시간이 지날수록 사회공헌 활동이 갖는 의미가 점점 커진다고 느꼈다. 개인 사업에도 물론 역량을 다하고 있지만, 점차 봉사활동을 하는 데 많은 관심이 간다. 보람과 감사함을 통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박형규 기자
2022-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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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 SK미래관 로비에 걸린 <연화와의 만남>을 배경으로 서 있는 김은주 교우 가정교육학을 전공한 김은주 교우는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의류학 석사과정을 거치며 본격적인 퀼트 작가가 됐다. 언제 퀼트를 시작했냐는 질문에 바늘을 잡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퀼트를 해온 셈이라고 답했다. 퀼트로 개인전을 여는 국내의 몇 안되는 선구자인 김 교우의 과제는 무엇보다 '퀼트로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상명대학교 디자인대학원 등에서 25년간 강의를 해오면서도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2010년 ‘한국퀼트페스티벌’을 창설해 5년간 준비위원장을 역임했다. 뿐만 아니라 《리빙 퀼트》, 《머신 퀼트》 등 기술 전문서만 4권을 출간하고, 한국퀼트연합(CQA)이 주관하는 ‘퀼트 자격증’을 국내 최초로 제도화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현재는 퀼트마을협동조합을 발족해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주부들의 취미 수준이 아니라, 교육 및 체험과 완제품 판매가 가능한 페어나 박람회 차원으로 퀼트 문화를 성장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오고 있다. 우리 고유의 것을 담은 K-퀼트 미국과 유럽에서 인정받은 작가인 김 교우는 한국적인 퀼트를 창안하는데 무엇보다 주력했다. “퀼트는 서양에서 온 것이지만 그 기법과 패턴만큼은 저만의 것, 한국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천을 실처럼 엮어 새로운 원단을 짜내는 ‘직조(weaving)’ 방식입니다. 원래 퀼트에서는 재봉틀을 이용해 가느다란 실로 얇고 섬세하게 누비는 방식이 대부분인데, 저는 굵고 거칠게 자른 천을 수작업으로 엮어 서로 다른 질감이 그대로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했어요. 화려함과 아기자기함에 집중했던 기존의 트렌드에서 벗어나서, 수수하고 대담하고 투박한 멋이 담긴 퀼트를 새롭게 시도했던 것이 저만의 스타일이 됐죠.” 이런 직조 방식과 천을 여러 겹 덧붙여 입체감을 살리는 ‘아플리케(applique)’ 방식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작품이 김 교우가 작년에 본관 회의실에 기증한 <사각 속에 숨은 꽃들>이다. 이와 함께 SK미래관에 기증한 <연화와의 만남>은 2008년에 미국 ‘국립 퀼트 박물관’에 출품했던 대표작으로 현재는 교우와 재학생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모교에 작게나마 보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작년에 81학번 입학 40주년을 맞아 두 작품과 포토존을 특별 제작해 기증하게 됐습니다.” 모교를 담은 사진들을 천에 프린트해서 한 땀 한 땀 누빔 작업한 이 포토존은 어느 학번에서도 나올 수 없는 독보적인 기념물로 남을 것이다.전세계 유일의 독창적인 기법과 더불어, 김 교우는 연화문과 도깨비 문양 같은 한국적인 소재와 감수성을 접목시키며 다른 동양의 퀼트들과도 차별화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고대 출신 특유의 호랑이 정신이랄까 그 기백을 더해 만든 작품이 <네 얼굴 내 얼굴>이에요. 삼국, 고려, 조선 시대의 귀면문(鬼面文)들을 활용해서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도상을 퀼트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왼쪽사진부터 차례로) 1. 김은주 교우가 제작한 포토존 앞에서 입학40주년 기념 촬영 중인 81학번 교우들. 2. <네 얼굴 내 얼굴> 3. 모교 본관 회의실에 전시된 <사각 속에 숨은 꽃들>한 겹 두 겹 누빌수록 더해지는 힐링“바늘을 잡으면 잡념이 사라지고 정신적 안정을 가져다 줍니다. 지난한 시간과 정성을 쏟아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것이라는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또 여럿이 둘러앉아 꽃피우는 수다 속에 무르익는 퀼트 모임은 치매 예방 효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힐링제랍니다.” 이런 퀼트의 치유 효과를 나누기 위해 김 교우는 오는 4월부터 국립암센터의 암환자 사회복귀 지원을 위한 ‘리본(Re:born)센터’에서 완치자 재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하는 퀼트 강연을 계획하고 있다. 내년 1월 예정된 다섯 번째 개인전 준비와 여러 강연, 협회 일정들로 쉴 틈 없이 바쁜 와중에도 김 교우는 교우회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왔다. 2015년에 가정교육과 교우회장을 맡은 데 이어 2019년부터는 고대여성포럼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코로나로 그간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지만 올해에는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교우와 재학생이 직접 만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TED 형식의 강연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강주형 기자
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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