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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정돌이> 감독김대현(경영85) 교우<다방의 푸른 꿈> 통해 아카이빙 다큐의 길 찾아 <정돌이>의 10월 전국 동시 개봉을 목표로다큐영화감독, 독립영화감독, 독립영화 제작자. 김대현 교우의 직업을 가리키는 단어다. 영화감독 하면 1000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봉준호, 박찬욱, 이준익 등 유명인사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반면 ‘독립’이나 ‘다큐’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왠지 고독한 자유주의자의 비애가 느껴진다. 폭염이 예사롭지 않았던 6월 말, 광화문에서 김 교우를 만났다.“사실 영화계에 갓 입문했던 90년대 초반에는 다큐 영화나 독립 영화에 대한 개념조차도 분명하지 않았어요. 물론 상업 영화를 만들어 돈을 벌겠다는 생각도 없었고요. 다만 의미 있는 영화 자체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당시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등의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가 개봉하면서 큰 호응을 받았어요. 그때 강렬한 희망 같은 것을 품게 됐어요.” 혹독했던 10년간의 시간을 견디며1990년 25살 청년 김대현 교우의 선택은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대학원 진학이었다. 이 선택이 결국 35년 외길 인생의 출발점이 됐다. 김 교우는 대학원 입학과 동시에 충무로 영화 제작 현장을 <그들도 우리처럼> 막내 스태프로 경험했다. 당시 김 교우의 사수는 <서울의 봄>으로 유명한 김성수 감독이다. 1991년부터는 직접 영화를 제작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서울국제독립영화제를 창설했을 뿐 아니라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들과 의기투합해 단편영화 배급에 나섰다. 영화 제작과 함께 배급을 병행하는, 국내 최초의 시도였다. 하지만 김 교우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기나긴 터널 같은 10년 남짓한 슬럼프였다. “처음 몇 년은 마음먹은 대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어요.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데뷔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장편영화를 찍었는데 흥행에 참패하기도 했어요. 90년대 초반에 함께 영화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데뷔해 엄청난 흥행 기록을 세우는 것을 지켜보면서 초조해지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에 무척 괴로웠어요.” 오랜 시간의 혼란과 좌절, 더 엄중한 선택을 해야 할 때, 김 교우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자신의 문화적인 출발점을 살폈다. 그리고 그 최초의 감성을 되살려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그 결실이 바로 다큐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이었다. 이 영화는 걸그룹 및 한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김시스터즈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2015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영화 완성 후 김 교우는 스스로를 옭아맨 작품성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새롭게 태어났다. 차분하게 인터뷰를 이어가던 김 교우는 이 대목에서 톤을 높였다. 내 인생의 영화, <다방의 푸른 꿈>과 <정돌이>“<다방의 푸른 꿈>이 제 영화와 인생의 터닝포인트인 셈이죠. 이때부터 제대로 된 작품 하나 만들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됐어요. 그리고 음악 세계에 대한 아카이빙 다큐가 내 몸에 맞는 옷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어쩌면 그동안은 꿈이나 목표가 없었던 셈인데 좀 늦긴 했지만 이제는 그 꿈이 선명하게 보여요. 아카이빙 다큐를 베이스로 해서 거기에 인류학, 생태, 역사 등의 콘텐츠가 어우러진 장기 프로젝트를 힘이 닿을 때까지 진행하는 것, 이게 제 꿈입니다.” 실제로 <다방의 푸른 꿈> 이후 김 교우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매년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으며 의욕적인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또 오랜 시간 나목(裸木)이 돼 비바람을 견뎌냈던 만큼 작품성이 무르익으면서 영화인들 사이에서 “믿고 보는 김대현 감독!”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바야흐로 김 교우의 전성기는 나이 60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이다. 최근 김 교우는 왕성하게 활동중이다. 최대 관심사는 영화 <정돌이>다. 이 영화에 대한 김 교우의 애정은 각별하다. 이 영화는 실제 모교에서 있었던 실화에 기초해 모교 80년대 학생운동사를 압축한 작품이다. 특징적인 것은 14살 소년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란 점이다. 1987년 4월, 가정폭력을 피해 무작정 가출한 한 꼬마가 우연히 고대생을 만나 학교에 머물게 되는데, 소년의 시선에 따라 스크린에 1980년대 격동의 순간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시사회를 거치면서 교우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후원금이 쇄도하고 있다. “운동권들뿐 아니라 1980년대를 함께했던 모든 사람들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 같이 공감하며 감상할 수 있는, 우리 역사의 치열한 내러티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감회가 새로운 작품입니다. 학생운동 언저리에서 기웃거렸던 40년 전 기억만 가물가물하고 학교와의 연은 끊어진 줄 알았는데, 막상 영화를 찍으면서 여전히 모교가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교우들이 가장 앞에 선 관람 행렬 기대교우들의 격려와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10월 전국 동시 개봉을 목표로 스스로 불꽃이 되겠다는 김대현 교우. 그 투혼이 한여름의 더위마저 무색하게 할 기세다. 김 교우의 바람대로 고대인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지만 고대인들이 가장 앞에 선 관람 행렬을 기대해 본다. 대담·정리 권무혁(국문85) 어나더북스 대표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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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디 대표 안상원(경영08) 교우 ‘내가 이 사업 끝까지 해보겠다’ vs ‘이거 안 되면 다른 거 하지’욕심내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게 성장의 기반어렸을 때부터 성공한 기업가가 되고 싶었다는 안상원 교우. 그는 요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채로 친구와 함께 샐러드 전문점 창업에 뛰어들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어느덧 국내 1위 샐러드 프랜차이즈 ‘샐러디’의 대표가 됐다. 창업의 꿈을 품다사업을 하던 안 교우의 아버지는 중학교 때부터 “사업을 하면 나중에 인생 잘 살 수 있다”며 안 교우에게 창업의 꿈을 심어줬다. 모교 경영학과에 진학한 안 교우는 전역 후 2012년 인사이더스(INSIDERS, 고려대-연세대 연합 창업 학회)에 3기 회원으로 가입했다. 만들어진 지 1년 남짓 된 학회였다.당시 인사이더스에는 5명으로 한 팀을 꾸려 100만원으로 창업에 도전하는 ‘5인의 사업가’ 프로그램이 있었다. 안 교우의 첫 창업 아이템도 여기서 나왔다. “식당 수저 밑에 까는 위생용 종이 하단에 근처 카페들의 광고를 붙이는 사업을 했어요. 의향을 나타낸 곳은 많았는데, 실제 계약까지 이루어진 건 없었어요.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모르니까, 광고비를 지출하기 어려웠던 거죠.”아이템은 샐러드로!인사이더스에서는 모교는 모교끼리, 연세대는 연세대끼리 팀을 구성해 활동했다. 그러던 중 워크숍에서 같은 기수의 연세대 출신 이건호 대표를 만났다. “가치관이나 목표가 저랑 유사하더라고요. 같이 창업하면 잘 맞겠다고 생각했죠.” 두 사람은 학회 수료 후 함께 창업 준비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선정한 아이템은 ‘샐러드 전문점’이었다. 이 대표가 미국에 있을 때 본 샐러드 전문점에서 영감을 얻은 것. 안 교우는 “머릿속에서 우리가 만든 매장이 전국에 깔린 모습이 선명히 상상됐다”며 창업을 준비할 당시를 떠올렸다.첫 매장을 열다첫 매장을 열기까지는 1년이 걸렸다. 어디에 매장을 낼지가 문제였다. 유동인구, 임대료, 타깃을 모두 고려해, 직장인이 많은 선릉역, 그리고 대학생이 많은 이화여대 중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두 사람은 시장조사에 들어갔고, 그중 반응이 더 좋았던 선릉역에 1호점을 냈다. 2013년 11월 개업 당시의 소감을 묻자 안 교우는 “잘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며 “계속 일만 하느라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단골의 피드백으로 도약하다처음부터 장사가 잘된 것은 아니었다. 안 교우는 “1호점을 연 후 몇 달 동안은 매출이 좋지 않았다”면서도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몇 년은 해보자는 각오로 시작했기 때문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보다 어떻게 하면 고객들이 더 만족할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단골손님들이 주는 피드백은 허투루 듣지 않았다. 매장 인테리어부터 메뉴 구성까지 변화를 준 결과 이듬해 5월부터는 매출이 급상승했다.2015년부터 가맹사업을 시작한 샐러디는 현재 360개가 넘는 매장을 보유한 프랜차이즈로 성장했다. 끈기와 몰입이 성장의 비결샐러디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안 교우는 “성공까지는 갈 길이 멀다”면서도 “장기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게 성장의 이유”라고 했다. “가맹점과 본사의 관계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면서, 거기에 맞게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좀 느리더라도 욕심내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게 꾸준히 성장하는 기반이 된 것 같아요.”안 교우는 성장의 또 다른 이유로 몰입을 꼽았다. 그는 특히 창업을 준비하거나 시작하려는 후배들에게 본인의 일에 몰입할 것을 강조했다. “사실 1~2년 만에 성과를 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요. 3~5년 이상은 봐야 성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이 1~2년 하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거든요. ‘내가 이 사업 끝까지 해보겠다’, 혹은 ‘이거 안 되면 다른 거 하지’, 이 마음가짐의 차이가 실제 성공 여부를 결정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전자였고.”앞으로도 도전은 계속안 교우에게 앞으로의 목표를 묻자, “국내에서 압도적인 1위 브랜드로 성장함은 물론 해외까지 영역을 넓히고 싶다”고 답했다. “매장의 70% 정도가 수도권에 있는데, 우선은 전국 단위로 잘 알려지고 매장 수도 많아지는 게 목표예요. 그리고 해외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모델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습니다.”하늘빛 기자
202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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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응원단과 두번째 인연..."새 응원단복을 통해 민족사학의 숭고한 얼, 정상급 글로벌 대학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어" 교우회와 호응회의 전폭적 지원... 고대 응원단 60년 역사 최초로 단복 전체 새로 제작중 고려대 응원단의 새 단복을 제작하고 계십니다. 고려대의 응원 문화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고려대가 연세대와 정기전을 지속적으로 개최하며 선의의 경쟁을 통해 교류하고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 작업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기전을 비롯해 응원 오리엔테이션에서 진행한 응원 영상 자료를 반복해서 보면서 받은 인상은 새롭고 달랐습니다, 고려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응원으로 하나 되어 보여주는 역동성에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고려대의 응원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절도와 패기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윤상 교우회 수석부회장(좌측)에게 제작 중인 단복에 대해 설명하는 김예진 명장총 몇 벌의 단복을 제작하게 되시나요? 단장복 두루마기 1벌을 포함해서 부단장단, 조단장단까지 총 29벌을 만들 예정입니다.어떤 계기로 작업하시게 되었나요?사실 이번이 응원단과 두 번째 인연이에요. 02년에도 단복 제작을 의뢰받아서 제작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 저를 찾아왔던 응원단원이 바로 현 호응회 한정화(화학99)부회장입니다. 이번에도 저를 다시 찾아와 설득하는데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응원단과 고려대에 대한 진정성이 변치 않았더라고요. 이전에 연세대에서도 요청이 있었지만 고려대와의 인연 때문에 거절했어요. 고려대가 가지고 있는 민족사학으로서의 숭고한 얼, 그리고 정상급 글로벌 대학으로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 제가 응원단복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새 응원단복 제작을 적극 추진한 두 주역 정재익 호응회 회장(좌측)과 한정화 호응회 부회장이번에 제작하시는 응원단복이 기존 단복과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달라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첫째로, 민족사학으로서의 고려대의 정체성과, 전통의 가치를 표현할 예정입니다. 기존의 두루마기, 장군복 등에서 드러나는 한복의 미를 살리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응원단이 땀에 젖고 비를 맞더라도 마음껏 역동적인 응원을 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보완하고 발수소재 옷감 등을 사용해 응원복의 본래 기능에 충실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옷 자체로서도 누구나 입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만들고 있어요. 최근 외국인 학생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해서, 고려대의 멋과 아름다움을 전통과 글로벌의 조화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고연전 첫 공개에서 국내·외 재학생과 교우 그리고 연대생까지 감탄할 만한 응원단복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런 컨셉이나 모티프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실지 궁금합니다. 살짝 엿볼 수 있을까요?현재 가봉단계까지 진행된 단복이 하나 있어요. 응원단장이 입는 두루마기 형태의 응원복입니다. 호랑이가 응원단장의 온몸을 감싸는 듯이 디자인해서, 멀리서 봤을 때도 잘 보일 수 있게 하고 호랑이의 용맹과 기세를 과감하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고려대 교색인 크림슨을 바탕으로 하고, 소재나 세밀한 패턴까지 고려대와 응원단을 상징하도록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한복의 고름 매듭을 응용해서 어깨 쪽에 화려하고 웅장한 장식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 세세한 부분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큰 줄기는 변하지 않을 거에요. 응원단복 제작 작업이 주로 해 오신 한복 작업과 다른 점이 있다면?이전에 제가 제작한 ‘미스터 선샤인’의 예를 들자면, 컨셉 확정 -> 고증작업 -> 옷 만들기 이렇게 세 단계 정도로 6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작업을 했습니다. 이번 응원단복 제작은 그보다 짧은 시간에, 학년별로 각각 컨셉을 잡고, 디자인을 하고, 옷만들기까지 끝내야 해요. 전체 29벌 교체는 응원단 60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던데,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끼며 분주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움직임에 지장을 주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옷을 제작하기 전에 영상을 보며 구상하고, 가제작한 옷을 단원에게 입힌 뒤 동작에 지장이 없는지까지 확인하느라 응원단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를 위해 같은 동작을 몇 차례씩 반복해 보여주는 박진혁(건사환17) 응원단장, 김서연(사회22) 부단장이 고맙죠. 시착과 동작 점검 등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박진혁 현 응원단장과 김서연 부단장 새 단복을 입을 고대 응원단, 그리고 교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응원단복 개선 사업을 진행하게 된 과정을 전해 듣고 고려대 구성원 사회의 분위기라고 할지, 관계를 이어 오는 방식이 정말 감명 깊었어요. 고려대 응원단뿐 아니라 교우들의 재학생과 모교를 생각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놀랐어요. 현역 응원단원들을 위한 일에 선배들인 호응회와 교우회가 선뜻 나서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응원단원들은 오리엔테이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연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몇 달간 쉬지 않고 땀 흘려 훈련한다고 하고요. 응원단 학생들의 일사분란한 몸짓과 진행을 보면서 단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이렇게 훌륭한 공동체와 작업할 기회를 얻은 것이 영광스럽고, 응원단과 고대 선후배들, 교우들의 기대에 부응해 저 역시 최선의 결과물을 올 가을에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202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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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금기탁자 스토리임베드로장학재단 자식을 키우는 마음으로 지난해부터 장학 사업을 시작한 부부가 있다. 임베드로장학재단의 임재덕(농학67) 이사장과 이욱자(농학70) 후원회장이다. 두 사람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유지를 기리고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재단을 설립했다.평생의 꿈이 생기다임재덕 교우는 가난한 농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는 미원그룹(現 대상그룹)의 세림장학회에서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이때부터 어려운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임재덕 교우는 졸업 후 미원그룹에서 20년, BASF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30년 동안 생화학 제품 연구개발 분야에서 일하다 퇴직한 그는 2007년부터 부동산임대업으로 돈을 모았다. 평생의 꿈인 장학 사업을 위해서였다. 본격적으로 재단 설립을 준비한 것은 3년 전부터였다. 당초 100억원 규모로 시도했지만, 주무기관인 서울시교육청에서 소액으로 설립할 것을 권해 계획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임재덕 교우는 포기하지 않고 재단의 규모를 단계적으로 키워나갈 생각이다.아들 이름으로 만든 재단재단의 이름은 아들인 임효진(경영94) 교우의 세례명에서 따왔다. 모교에서 2학년 수료 후 입대한 임효진 교우는 군 복무 도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원래 남매를 뒀는데, 아들이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렸어요. 그 슬픔과 사랑을 담아 퇴직하고 나서 아들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만들고 싶었어요.”아들 몫으로 돌아갈 상속분을 사회에 환원해 장학 사업에 쓰기로 했다. 아내 이욱자 교우를 비롯해 딸과 사위도 흔쾌히 동의했다. “딸이 지금 의사고, 사위도 아주 훌륭한 법관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앞가림은 충분히 해요. 그래서 (아들 몫이라도) 환원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 실천에 옮긴 겁니다.”가장 보람찼던 순간은임베드로장학재단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선발해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지급한다.고등학교 3학년에게는 1년 동안 매달 30만원을, 대학교 3학년에게는 2년 동안 학기마다 200만원을 지원한다.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였는지를 묻자, 이욱자 교우는 지난해 고등학생 2명을 후원했을 때를 떠올렸다.“올해 대학을 갔는데, 교우회관에서 장학증서 수여식을 하고 오는 차 안에서 메시지를 본 거예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어서 너무 감사드리고,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게 되면 후배를 위해서 선배님처럼 하고 싶다’고. 이런 감동을 주는 메시지를 받을 줄은 몰랐어요. 나는 장학 사업을 썩 내켜 하지 않았었거든요.”모교를 기억하는 마음으로한편 임베드로장학재단은 올해부터 모교 경영대학 재학생에게 장학금을 우선 지급하고 있다. 생전 아들이 다녔던 모교 경영대학의 재학생들에게 긍지와 사기를 북돋아주고, 국가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역군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다. 앞으로 더 많은 고대생들에게 장학금을 후원할 계획이다.“현재 고대생은 5명이 장학금을 받고 있는데, 2배 정도까지 늘릴 계획입니다. 나는 내가 하겠다는 거 아직 후퇴한 일은 없어요.”하늘빛 기자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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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법 전문 변리사 정혜진(생명과학11) 교우 여러 차례의 실패와 극복해낸 경험도움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누구나 일이 잘 안 풀리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결정은 둘 중 하나다. 꾹 참고 다시 한 번 해보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하거나. 청춘 노트의 주인공 정혜진(생명과학11) 교우는 전자를 택했다. 정 교우는 9년 간의 수험생활 끝에 제60회 변리사 시험에 합격했다. 9년간의 수험 생활을 진솔하게 들려준 정 교우의 유튜브 영상에는 “내 이야기 같다”, “최고의 합격 수기다”, “힘을 얻고 간다”는 댓글이 달려 있다. 정 교우는 “이제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디뎌서 수많은 교우 앞에서 제 얘기를 하는 게 부담도 되지만 제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인터뷰 내내 밝고 당찬 기운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전했다. 팔전구기, 변리사가 되기까지 6개월 차 변리사인 정 교우의 주된 업무는 발명자가 자신의 발명에 대해 특허를 받을 수 있도록 서면을 작성하는 일이다. 학부생 때 어느 변리사의 교양 수업을 들은 것이 직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적극적으로 진로를 탐색하던 시기였어요. 학사지원부에 가 그분 연락처를 알아내 직접 연락드렸죠. 업무에 관해 정말 세세하게 정보를 알려주셨는데, 그중 ‘우리는 늘 창의적인 사람만 만나.’ 하는 그분의 말이 딱 마음에 꽂히더라고요. 새롭고 재밌는 걸 좋아하는 제 성향과도 잘 맞아 보였어요.”정 교우는 좋아했던 전공 지식을 활용하며 상용화되기 이전의 기술을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다. 이후 4학년, 23살의 나이에 변리사시험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변리사가 되기 위한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근소한 점수 차이로 시험에 낙방하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죠. 밀도 있게 끝까지 공부해야 했는데,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중도 하차하기를 반복했어요. 20대 중후반 돼서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불안한 게 너무 컸죠.” 하지만 정 교우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에 쉽사리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제대로 하면 붙을 것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 교우가 마지막으로 시험을 준비한 작년은 책과 본인밖에 없었다고 표현한다. “다른 생각이 아예 못 들어오게 외부 요인을 완전히 차단했어요. 아빠가 그때 해주신 말씀이 ‘눈앞에 있는 거에만 집중하라’였어요. 공부가 안되거나 불안감이 들면 바로 강의 녹음을 들었죠. 그렇게 하니까 덜 힘들더라구요.” 힘든 과정 끝에 거머쥔 성공은 정 교우에게 긍정의 힘을 알려주었고, 그때 얻은 깨달음으로 현재의 삶도 살아간다고 한다. “바쁜 일정에 피곤하다가도 마음을 내려놓고 눈앞에 있는 거에만 집중하면 어느 순간 일이 잘 풀리는 경험을 계속해서 해요. 이전에는 난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컸어요. 시험장에서 시험을 보면서 다른 기업 원서 접수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럴 때마다 꼭 아쉽게 떨어지더라구요.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교수님께 직접 연락드리던 학창시절1학년 때 반대표를 맡아 학생회를 시작하고, 다음 해에는 학생회 부회장까지 맡게 된 정 교우. 기존에 없던 행사를 기획해 교수와 재학생 간의 자연스러운 만남의 장을 만들기도 했다. “교수님들께 먼저 연락을 드려 만나 뵙고, 교양 수업의 교수님, 학번 차이가 많이 나는 동아리 선배까지 개인적으로 연락 드려가며 폭넓게 만났어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인 모교에 왔다면 저처럼 최대한 연결고리를 많이 만들고 졸업해야 뒤돌아봤을 때 후회가 없지 않을까 해요.” 또한, 선배나 교수님이 본인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어려워하기보다는 예의를 갖추되, 편한 마음으로 진로뿐만 아니라 일상 얘기도 나눠 보기를 조언했다. 전문가란 표현이 마땅한 사람 되고파향후 계획을 묻자 전문가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직무의 방향성이 넓어서 다양하게 진로를 탐색하는 중이라고도 한다. “우선은 여러 번의 실패와 그것을 극복해낸 경험을 바탕으로 얻은 것을, 도움이 필요한 누구에게든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요. 또, 지금 제가 너무 재밌게 하고 있는 제 일을 더 많이 알리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조수민 기자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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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당시를 회고하는 서경석(사학61) 예비역 중장 “고려대학교는 나의 자존심 … 힘이 있어야 평화가 옵니다” 서경석(사학61) 예비역 중장 교우회보에서는 호국 보훈의 달 6월을 맞이하여 모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서경석 예비역 중장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서 교우는 베트남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투감각>을 집필했다. 모교에서 ‘손자병법’과 ‘리더십’을 주제로 오랫동안 강의했고 그 내용을 <그대, 내일의 리더에게>로 정리해 출간하기도 했다. 고대에 입학한 계기와,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면학하는 가풍이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랐어요. 일제 강점기라는 엄혹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선친께서는 연희전문에서, 어머니께서는 서울여상에서 수학하셨어요. 그런 분위기라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지요. 모교의 “자유·정의·진리” 교훈이 가진 큰 뜻과 호랑이가 가진 용기와 기개가 내 기질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 고대에 입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중에 제 두 아우 모두 모교에서 공부했어요. 역사를 잘 아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첫걸음이라 생각해 사학과에 진학했고, 졸업한 뒤에는 유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재학 시절에 고고학회에서 활동하면서 발굴과 답사를 위해 전국 각지를 누비고 다녔는데, 지금의 ‘하남 미사리 유적지’를 그때 우리가 처음 발굴했지요. 학창시절 기억 중에 가장 보람찬 기억이에요. 6월을 맞아 국가보훈부에서 한국 전쟁에 참전하신 선배님들을 기리는 사업을 준비중이라고 합니다. 선배님께서는 한국 전쟁을 어떻게 겪으셨는지요. 당시에 국민학교 3학년이었어요. 포천에 살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동란의 한복판에 있었던 거에요. 전쟁이 터지고 나서 제 기억으로는 북한군하고 그 추종 세력에 의한 납치, 감금이 빈번했습니다. 당시 금융 기관에서 일하시던 제 부친께서도 그런 일을 겪으셨어요. 북한군에게 납치당해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가던 와중에 극적으로 탈출해서 포천 너머 명성산까지 도망치셨어요. 헤어진 뒤에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던 아버지를 그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북한군에 선동된 담임 선생님을 따라가 인민재판 과정을 두 눈으로 보기도 했어요. 나이가 어려 마지막 판결과정까지는 못 봤지만 박수부대가 어떤 것인지 그때 똑똑히 봤지요. 아마 어릴 적에 겪은 이러한 충격적인 경험들이 제가 가지고 있는 애국심의 기틀이 되고, 이후에 입대하는 데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께서는 베트남전에도 참전하셨고 그때의 경험을 책으로 집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 주십시오. 소위로 임관한 뒤 상관으로부터 야전경험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들었어요. 또, 당시에 파병 군인은 1년치 봉급을 일시불로 받고 전투 수당으로 월 150달러 정도를 받을 수 있었어요. 그 돈이면 남동생 둘의 등록금이 해결됐지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이런 현실적 이유도 있지 않았나 싶어요. 26개월 동안 베트남에서 소대장, 중대장으로 복무했는데 그 시간에는 힘든 줄 몰랐습니다. 베트남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뤘지만, 푸캇산 포위 작전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부대 인근 고지에 은닉해 있는 적군을 섬멸하는 작전이었어요. 소대별로 각개 전투를 시작했는데, 내가 지휘하는 소대는 교범에 따라 갈 지(之)자로 목표 거점에 접근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소대는 교범을 무시하고 안이하게 논둑을 따라 일렬로 구릉에 접근하다가 적군에게 노출되어 첨병과 무전병이 즉사하고 큰 피해를 입었어요. 적군을 소탕하고 보니 우리 소대는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었지요. 그날의 전투 경험이 나에게 “교범대로 하라”라는 철칙을 만들게 했습니다. 베트남전 참전 당시 모습(사진자료 제공 : 서경석 예비역 중장) 베트남과 관련된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화기 소대가 생포한 포로를 너무 가혹하게 다뤄서 군사 재판이 열릴 뻔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 61학번 동기 모임 자리에서 법대 61학번 유지담 판사가 베트남에서 있었던 그 포로 관련 재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때 확인해 보니 그 당신 재판을 담당했던 군법무관이 바로 유지담 판사였던 거예요. 전장에서는 서로 모르다가 동기회 모임에서 알고 나서 감회에 젖었던 일화입니다. 귀국하고 나서 훗날 5공수여단장으로 부임하였을때 『전투감각』에 대해 집필했습니다. 파병 당시에 작성한 일기와 메모, 자료를 정리해서 썼는데 3년이 걸렸어요. 그런데 젊은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그래요. 육군에서는 필독서로 지정됐고, 육군사관학교 도서관에서는 책장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인기가 많다고 들었어요. 실제 전투 경험을 쓴 책은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나중에는 영어로 번역돼 미군에서도 교재로 활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선배님께서는 모교에서 재학생들에게도 손자병법과 리더십 주제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교훈 부탁드립니다. 육군대학에서 교관으로 손자병법 강의를 했어요. 그런데 사학과 김정배 교수님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나중에 전역하면 학교에서 수업을 맡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36년 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김 교수님께서 14대 총장으로 취임하신 뒤에 그 약속대로 강단에서 후배들에게 손자병법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 자주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작은 호텔 지배인으로 일하던 조지 볼트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숙소를 구하지 못한 노부부가 볼트의 호텔에 방문합니다. 하지만 그 호텔에도 빈 방이 없었어요. 볼트는 곤란을 겪는 노부부를 내치는 대신에 자기 방을 양보해 머무르게 했어요. 그 노부부는 훗날에 뉴욕에 객실이 1,442개나 있는 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를 설립하고 자신들에게 친절을 베푼 조지 볼트에게 그 호텔 운영을 맡깁니다. 저는 이 일화를 통해 “사람은 스스로의 자리에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어떻게 보면 저 역시 조지 볼트와 마찬가지로 군대에서 제 본분을 다했기 때문에 중장까지 진급할 수 있었고, 모교에서 강의할 기회까지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준비에 참고했던 전(前) 미국 국무부장관 콜린 파월이 쓴 『실전리더십』에서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어떤 임무를 부여받건 투덜대지 않고(Never Mumble) 최선을 다했다...’ 콜린 파월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최선을 다하는 태도’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선배님의 삶에서 고려대학교는 무엇입니까? 고려대학교는 내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어요.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걸쳐 고려대학교까치 인촌 김성수 선생님께서 설립하신 학교를 10년 동안 다녔으니까요. 알다시피, 고려대학교는 우리나라 민족 자본으로 설립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다른 대학들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바로 이러한 특수성이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자긍심의 뿌리입니다. 모교를 졸업한 뒤에, 군대에서도 그렇고 어디를 가도 “서경석”이라고 하면 누구나 “그 고려대학교 출신”이라고 했고 저는 그것이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겼어요. 단순하기는 하지만, 나의 삶에 있어서 고려대학교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고려대학교는 나의 자존심이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36년 동안 군에서 복무했습니다. 이후에 우연치 않은 기회로 10년 동안 모교에서 강의했고, 그 뒤에 3년 간의 동티모르 대사로 외교관 생활을 했어요. 이러한 짧지 않은 삶의 경험 뒤에 제가 깨달은 것은 “힘이 있어야 평화가 온다”라는 것입니다. 현재 남한과 북한은 여전히 대치하고 있고 군사적인 긴장감이 줄어들지 않고 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나날이 현역 입영 장병 수가 부족한 것에 대해 우려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와 더불어, 낮은 출산율과 결혼하지 않는 세태 역시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운 상황일수록 슬기롭게 극복하고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경석 교우는... 약력 모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65년 ROTC 3기로 임관하였다. 1966년 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로 파병되어, 학군사관장교 최초의 소총 중대장으로 근무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의 경험과 전투현장 기록을 바탕으로 『전투감각』을 집필하였다. 199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후 모교에서 ‘전쟁과 국가’, ‘지도자론’을 강의하였고, 2009~2012년 동티모르 대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군 장병을 대상으로 안보 및 전투경험을 주제로 강연하고, 현재, 네이버 블로그 「그대, 내일의 리더에게」를 운영하며 전장경험, 리더십, 손자병법 등 다양한 주제로 미래 세대와 소통하고 있다. 저서 『전투감각』 : 26개월간의 베트남전 참전기간 동안의 실전 기록. 「육군 필독서 20」에 지정된 바 있으며, 영어번역본은 미국 전투병과학교의 공식교재로 채택되었다. 『그대, 내일의 리더에게』 : 손자병법의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 다섯 덕목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들이 갖추어야 할 리더십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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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엔피코스메틱㈜ 대표 권오섭(지질78) 교우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250억원 이상 기부평생을 바쳐 기부하는 문화가 모교에 이어지길“더 열심히 벌어 사회와 어려운 곳에 계속 기부하겠습니다.”올해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상한 권오섭 교우(지질78)는 수상 소감에서도 나눔을 강조했다.30여 년간 화장품 외길인생을 걸어온 권 교우는 실패와 역경을 딛고 성공 가도에 들어섰다. 엘엔피코스메틱 대표로서 화장품 브랜드 ‘메디힐’을 세계 45개국에 성공적으로 진출시키며 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유니콘 기업으로 이끌었다.그의 가장 큰 덕목은 자신의 성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나눔과 봉사를 통해 기업이익의 사회 환원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특히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모교와 교우회 발전을 위해 250억원 이상을 기부하는 등 모교 사랑을 열정적으로 실천하면서 모든 고대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며 “앞으로 사회와 학교를 위해 봉사하라는 것으로 생각하겠다”는 겸손한 마음을 드러냈다.맘 편히 공부할 곳 세워주고파무엇이든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기부를 먼저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사업에 뛰어든 권 교우도 마찬가지였다. 부채를 감당하면서도 기부를 시작했다. ‘메디힐지구환경관’ 건립 기금 등 모교 기부도 그런 취지로 진행됐다.“11년 반을 지질학 관련 공부를 하고 관련 일을 하다가 화장품 업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선후배들은 전공을 살려 연구소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등 전공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죠. 그들이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기부를 하게 됐습니다.” 미국 유학으로 선진국의 교육 환경을 경험한 것도 도움이 됐다. “전공 공부를 하며 미국 유학을 갔는데 학과마다 건물이 있더라고요. 성공한다면 내가 이런 건물을 하나 지어주는 것이 내 보람이 아닐까 생각했죠. 우리 후배들도 넉넉한 공간이, 교수님들도 연구실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지난 2020년 7월 준공식을 가진 메디힐지구환경관은 지하 1층, 지상 7층, 연면적 7041㎡(약 2130평) 규모로 권 교우가 나온 지질학과의 후신인 지구환경과학과가 들어섰다. “건축 자금으로 120억원을 냈는데 사실 건물 안에 연구 기자재들이 필요하잖아요. 과 후배였던 안성호(지질87‧에이스침대 대표) 교우와 논의해 각자 20억씩 더 기부했습니다.”훌륭한 선배들 본받아 교우활동권오섭 교우는 자신과 교우회와의 인연도 나눔을 실천하는 교우들과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연이 닿은 것이라 말한다. 권 교우는 현재 고대경제인회 회장 등 교우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구자열 회장님, 문규영 회장님, 승명호 회장님 등 본받고 싶은 선배님들을 따라 함께 하다 보니 교우회와 인연이 깊어졌습니다. 교우들과의 끈끈한 친목뿐만 아니라 현재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교우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죠.”비단 교우회와 모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회에 여러 기부를 진행하고 있다. 강서구 장학회, 법무부 청소년 범죄예방위원 서울남부지역협의회, 서울 남부지역 법사랑장학재단 등에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메디힐 장학재단을 설립해 국내 대학생들과 교육 복지기관 등에도 지원하고 있다. 상생과 사회적 책임을 완수한다는 그의 경영이념이다.“꿈 포기 말고 항상 도전하길”이런 권오섭 교우의 행보는 다른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특히 성공을 꿈꾸는 학생들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거든요. 꿈꾸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항상 도전하기 바랍니다.”평범한 말 같지만, 실패와 성공을 모두 경험한 그의 말에는 울림이 있다. 1990년대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이후 겪었던 여러 좌절은 2009년 엘엔피코스메틱의 시작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홈케어 시장을 예견해 전문성을 강조한 마스크팩 브랜드 메디힐도 수많은 노력 끝에 탄생했다. 2015년 판매를 시작한 메디힐 마스크팩은 현재 누적판매량 30억장을 돌파했다. 중국, 일본, 미국 등 세계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현재 45여개국에 진출했다. 2018년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으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경영이념을 인정받아 2018년 대한민국 일자리 으뜸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지금 메디힐이 저에게 세 번째입니다. 한번은 완전히 망했고, 두 번째는 절반의 성공이었죠. 이제 조금 성공한 듯합니다. ‘남들이 하는 것이 좋아 보이니 나도 해볼까’해서는 성공하기 쉽지 않아요.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실패하지 않는 것이 더 좋잖아요? 실패하지 않도록 더 철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요. 제가 두 번 실패하면서 몸으로 느낀 겁니다.”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을 청하자 그는 다시 기부를 강조했다. “한 번하고 끝나는 기부는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평생을 바쳐서 기부하는 문화, 그런 문화가 우리 고려대학교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래야 또 채워집니다. 기부하고 채우고 기부하고 채우는 그런 고려대학교의 선후배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이재익 기자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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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 강석희(농경제71) 교우 한인 정치력 신장 위한든든한 뒷배 될 것1992년 미국 LA, 한인 사업체들은 흑인들의 폭동으로 아비규환이었다. 경찰은 한인타운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한국인이 미국 사회에서 목소리가 약해서, 곧 정치력이 없어서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개인과 가정에 충실하던 이민 1세대 세일즈맨은 LA 폭동을 계기로 한인 사회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강석희 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의 이야기다. 한국 방문을 앞두고 화상 인터뷰로 만난 강 교우는 ‘자유, 정의, 진리’를 강조하며 녹슬지 않은 고대 사랑을 내비쳤다.자유, 정의, 진리로 미국에 서다1977년에 모교를 졸업한 강 교우는 같은 해 6월, 아내 최원희(식품공73) 교우와 함께 캘리포니아 땅을 밟았다. 전자제품 유통 기업 ‘서킷시티’의 아시아계 최초 총매니저, 2008년 어바인 시장 당선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강 교우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도전정신의 원천을 묻자, 그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려대’라고 답했다. “원래부터 리더십이 있다거나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반장을 해본 적도 없죠. 그런 제가 고려대를 만나 제 안의 잠재력을 찾을 수 있었어요.”그는 모교의 가르침을 평생토록 가슴에 품었다. “비록 조국을 떠나 있지만 미국에서 공직 생활을 할 때도 늘 ‘자유, 정의, 진리’를 기준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모교의 교훈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인 이민 1세 최초 직선 시장 당선강 교우는 1993년부터 한인사회에 봉사하기 시작했다. 한미장학재단 이사로 활동하며 ‘한인사회를 미국의 주류사회에 편입될 수 있도록 힘쓴 사람’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장학 사업이 제가 한인사회를 위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발로 뛰어 모금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 주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죠.” 강 교우가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활동 저변을 넓혀가자, 주변에서 먼저 정치 입문을 권하기 시작했다. 성실함 하나는 자신하던 강 교우는 5개월 동안 하루 4시간 이상씩 발로 뛰어 어바인 시의 2만 가구를 직접 방문했다. “한 주민은 ‘20년 넘게 이곳에 사는 동안 내 집 문을 두드린 후보는 당신이 처음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너를 찍겠다’라며 호응해 주셨어요. 유색인종의 이민자도 열심히 하면 뭔가를 이룰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어바인 시에서 2004년 시의원 당선, 2006년 재선을 거쳐 2008년 한인 최초 미주 지역 시장으로 당선됐다.순수한 봉사 정신으로 시작돼야2004년 중앙일보 칼럼에서 한 변호사는 강 교우의 정치 입문기에 대해 ‘정치 지망생들이 본받아야 할 정석’이라고 표현했다. 강 교우가 미국 사회에서 인종, 국적을 불문하고 지지를 받은 비결은 무엇일까. 정치인 강석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에 관해 묻자 일순 ‘순수함’이라고 답했다. “절대 개인을 위한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자발적으로 봉사하고자 시작했기에 모든 일에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행합니다. 간혹 ‘정치를 위한 선행 아니냐’라는 말을 들어도 떳떳할 수 있었죠. 그런 마음가짐이 지역사회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해요.” 경청하는 태도 또한 강 교우의 포용적 리더십을 뒷받침했다. “서킷시티의 영업 사원 시절부터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며 답을 찾았어요. 세일즈맨 강석희, 시장 강석희 모두 일관된 태도로 경청한 자세가 지역사회에 신뢰를 쌓는 바탕이 됐다고 생각합니다.”“I never give up!”신뢰와 성실을 바탕으로 이민자의 유리천장을 극복한 강 교우에게도 좌절은 있었다. 현직인 미국 지역 총괄 조달청장 면접에서 세 번의 거절을 당하자 강 교우의 딸은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그만하라고 말렸다. 강 교우는 당시 딸에게 한 대답을 또렷이 기억했다. “You know your dad better. I never give up! (네가 날 더 잘 알잖니. 아빠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그렇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붙잡아 대통령으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은 것에 더해 올해 1월에는 4명의 조달청장을 대표하는 선임 지역청장으로 승진했다.강 교우의 꿈은 여전히 미주 한인들의 발전으로 향해 있다. 그에게 앞으로의 소망을 묻자 ‘한인 출신 미국 대통령 배출’이라고 답했다. “이제 나이가 있으니 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할 수 있다면 우리 한인 2세, 3세들을 도와 미국의 연방 상원의원, 주지사, 나아가 한인 출신의 미국 대통령이 배출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강 교우는 한인회, 상공회의소 등 한인 정치 단체들이 한 마음으로 동참하면 미주 한인사회에서도 대통령 배출이 가능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다.강석희 교우(앞줄 네 번째)는 이달 7일 김양현홀에서 재학생 약 280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진행했다. 박지호 기자
2024-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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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스틸 대표이사·일본교우회장 최상영(경영69) 교우 개인적 성취를 넘어서 사회와 상생하는 삶 추구 재일교포 3세인 최상영 교우는 일본에서 영스틸을 창업해 굴지의 철강무역회사로 키워냈다. 성공한 기업인에 그치지 않고 한일 민간 교류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재일교포의 권리 증진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교우회에서 2009년 특별공로상과 ‘올해의 교우상’을, 2018년에는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받았다. 올해 명예박사를 수여받으며 교우에게 주어지는 영예를 모두 얻었다. 지난달 명예박사 수여식을 앞두고 최 교우를 만나 재학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삶의 궤적을 들을 수 있었다. 풍요롭고 알찬 재학시절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떤 연유로 모교에 입학하게 되었을까. 와카야마 지역 한인사회의 대표 역할을 하던 그의 할아버지는 조국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6·25가 터지자 아들 둘을 유엔군 지원병으로 참전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청소년기의 최 교우는 60년대 초 일본 언론에 보도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소식에 큰 관심을 가졌다. 민족을 위해 세워진 학교라는 점이 좋아서 모교를 선택했다는 최 교우는 4년의 재학시절을 다양한 활동으로 채웠다. 수영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최 교우는 국가대표 수영선수로도 활동한 바 있다. 모교에 재학 중인 재일교포 유학생을 모아 ‘호동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모교에 있는 동안 서로 도우면서 최대한 많이 배우고 돌아가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작은 조직이었는데, 점차 타 대학 학생들도 참여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이 됐죠.” 4·19혁명에 감명 받았던 그는 데모에도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모교에서 특별한 인연도 맺었다. 평생의 반려자인 박귀원(불문70) 교우를 만난 것이다. 최 교우는 졸업하자마자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한 박 교우를 데리고 일본에 돌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박 교우에게 생활이 안정되면 꼭 다시 복학시켜주겠다던 약속은 20여 년이 지나 지켜졌다. 박 교우는 2001년 졸업했다. 기업 이익뿐 아니라 사회적 공헌이 중요졸업 후 최 교우는 가업인 건축업을 잇는 대신 철강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재일교포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인과 똑같이 해서는 한국인의 존재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일본인보다 더 많은 시간 열심히 일했습니다.”최 교우는 20년 간 다녔던 직장이 도산하자 철강무역회사 영스틸을 창업해 현재 연매출 6000억 원을 상회하는 큰 회사로 키워냈다. 그는 기업의 이익창출에 못지않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 공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해왔다. “제 부모 세대는 파친코 운영이나 고리대금업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차별받고 억압받았죠. 외국인이라도 훌륭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일본 사회 내에서도 한국인과 일본인이 상생하며 발전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 교우는 한일 민간 교류에 가교 역할을 자처한 것은 물론 재일 민족학교 네 곳에 장학금을 후원해 다음 세대가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2004년에는 재일교포들과 함께 헌법소원을 제기해 재외국민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12년부터는 재일본 대한체육회장을 맡아 일본 내 우수한 체육 인재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있다.일본에서도 고대정신 이어가최 교우는 일본에서도 모교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글로벌 인재 장학금, 국제화 기금, 미래노벨상 기금 등 다양한 발전기금을 기부했고, 2002년부터 올해까지 22년 동안 일본교우회장을 역임하며 해외교우회의 수장으로서 모범적인 활동을 펼쳤다. 2003년부터 시작된 와세다대학교우회와 고대교우회의 교류협정도 최 교우가 힘쓴 덕분이다. 또한 모교 럭비부 선수들이 럭비 명문인 와세다대학 선수들과 함께 훈련받을 수 있도록 전지훈련 비용을 대기도 했다. 이후 모교 럭비부 선수들의 기량이 눈에 띄게 좋아졌으며, 매년 모교-와세다 친선 경기를 치르고 있다. “아버지께서 항상 돈은 더럽게 일해서 벌고, 쓰는 것은 깨끗한 데 쓰라고 하셨어요. 열심히 땀 흘리며 벌어서 좋은 곳에 쓰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거죠. 그 좋은 곳이 제게는 모교입니다. 졸업한 뒤에도 모교에서 배운 고대정신은 영원히 남아있습니다.”이번 명예박사 수여에 대한 소감을 묻자 최 교우는 “부족한 제게 왜 박사학위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모교에 많은 일을 하라는 뜻에서 준 거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며 사회적 환원을 이어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지원 편집장모교 발전과 교우 화합에 기여한 공로 인정받아 명예박사 수여해외교우회 본보기 제시후배들을 위한 아낌없는 지원최상영(경영69) 교우가 지난달 22일 모교 백주년기념삼성관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날 행사에는 김병철·염재호·정진택 전 총장과 승명호 교우회장, 최 교우의 수여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69동기회 교우들, 일본의 가족들과 교우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최 교우는 영스틸을 경영하며 철강 무역으로 한일 경제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과 2009년 상공의 날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바 있다. 재일본 대한체육회장으로서 체육 인재 발굴과 다양한 후원 사업을 펼치며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도 기여하고 있다. 최 교우는 일본교우회장에 선임된 이래 모교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 조성에 꾸준히 힘을 보태고 있으며, 와세다대학과 모교의 우호 관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모교는 작년 최 교우를 모교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김동원 모교총장은 “최상영 일본교우회장님의 뜻을 따르며 모교도 미래 사회에 공헌하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최 교우는 “제가 기업이나 사회에 이바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룬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진실한 마음으로 기부를 이어 가겠다”고 답했다. 박지호 기자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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