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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라 가리(미디어18)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연출 석사과정내가 보는 세상을 영화로안암에서 키운 영화감독의 꿈정부 초청 외국인 장학생으로 한국에 온 콜롬비아 출신 야라 가리(Yara Gari·미디어18) 교우. 모교 미디어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이제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고 있다. 모델과 단역배우로 카메라 앞에 선 경험마저 연출의 자양분으로 삼은 야라 교우의 이야기를 들어봤다.글. 이현화 선임기자 사진. 최기영 주간Q. 언제부터 영화감독을 꿈꾸셨나요?A. 제 고향은 콜롬비아 바랑키야(Barranquilla)예요. 콜롬비아 최대 항구도시로 ‘콜롬비아의 황금문’이라 불린답니다. 덕분에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만드는 걸 좋아했죠. 처음엔 작가를 꿈꿨지만, 점차 글보다 영상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데 더 큰 매력을 느꼈어요. 제가 보는 세상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Q. 그래서 모교 미디어대학에 오셨군요. 그것도 정부초청장학생으로?A.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국립국제교육원의 GKS(Global Korea Scholarship)장학생으로 등록금 전액을 지원받고 모교에 왔습니다. 한국드라마를 좋아해서 한국어를 오래 독학해온 점,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 한국과 콜롬비아의 가교가 되겠다’고 호소한 점을 좋게 보셨나봐요. 영화 만드는 데 돈이 많이 드는데 생활비까지 지원해 주셔서 참 감사했죠.Q. 한국에 좋은 대학이 많은데, 고려대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네요.A. 저도 ‘스카이’가 뭔지 알고 있었거든요(웃음). 서울대는 저널리즘, 연세대는 PR 분야 비중이 큰 반면, 고려대는 프로덕션 수업이 가장 다양했어요. 입학한 뒤 거의 모든 프로덕션 수업을 들었고, 제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죠. 특히 영화학회 활동을 하며 친구들과 첫 단편영화 를 만들었던 것이 가장 큰 전환점이었어요. 진짜 ‘영화인’으로 한 걸음 나아간 순간이랄까요?Q. 한국어 때문에 인생 첫F학점도 받으셨다고요.A.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마 ‘미디어학이론’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콜롬비아에서 미디어를 1년 동안 공부하면서 이미 아는 내용이었거든요. 문제는 한국어였어요. 제가 봐도 제가 뭐라고 쓴지 모르겠는데, 교수님이 보시기엔 오죽하셨겠어요(웃음). 그 일을 계기로 독하게 한국어 공부도 했고, 영어 답안 작성도 허락해 주셔서 다음 학기 재수강에서는 당당히 A를 받았답니다.(위)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감독과의 대화(아래) 한예종 미디어제작워크샵 수업 중 모니터링Q. 광고와 드라마에도 많이 출연하셨잖아요. 배우를 꿈꾸셨던 건가요?A.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를 만들 제작비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카메라 앞에 직접 서 보니까 배우의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실제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있었고요. 영화감독으로서 큰 배움을 얻었죠. 물론 오랫동안 좋아했던 장혁, 박은빈, 차은우 등의 배우랑 작업하며 ‘팬심’도 챙겼습니다(웃음).Q. 지금 한예종에서 영화연출 석사과정 중이죠? 이곳에서도 장학금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A. 정말 감사한 일이죠. 지금까지 단편영화 네 편을 만들었는데 그중 〈거북이(The Turtle)〉는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상영됐고, Young Director Award 2024에서는 Film School부문 쇼트리스트에 선정되기도 했어요.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조금씩 제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Q.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신가요?A. 관객이 등장인물의 마음을 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영화요.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영화 속에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공감하게 되잖아요. ‘내가 보는 세상’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죠. 제 작품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넓혀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Q. 마지막으로 모교 선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A. 고려대학교는 제게 감독이라는 꿈을 확신하게 해 준 곳입니다. 훌륭한 교수님과 친구들,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시간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어요. 그러니 학교가 제공하는 다양한 기회를 꼭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유학생들은 정보를 잘 몰라서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다양한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십분 활용해서 모두 자신만의 길을 찾길 바랍니다.37시간을 날아온 엄마와 함께추억 가득한 모교를 뒤로 하고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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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경(생물74)한·인니문화연구원장인도네시아에서 배운 겸손의 문법35년, 문화의 언어로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잇다시인이자 교육자, 문화기획자인 사공경(생물74) 교우. 35년 가까이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이어온 공로로 2023년 세계 한인의 날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외국인 교우 네트워크가 세계 곳곳으로 확장되는 요즘, 시집〈불멸의 테이블〉 출판기념 강연을 위해 모교를 찾은 그에게, ‘다름’을 이해하는 법을 들었다.글. 이현화 선임기자 사진. 정태서 기자낯섦은 두려움이 아니라 질문이었다1990년, 인도네시아에 부임한 남편(박희우·경영73)을 따라 처음 자카르타에 발을 디뎠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뜨거운 공기와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 식민의 흔적과 초고층 빌딩이 공존하는 풍경까지. 생물학도였지만 늘 문학에 열정을 품었던 사공경 교우는 그가 본 자카르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책들이 지금까지 공저 포함 12권에 달한다.“이 땅과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처음엔 제가 인도네시아를 기록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새 인도네시아가 저를 기록하고 있더군요.”사공 교우는 자신을 ‘순례자’라고 표현한다. 길 위에서 배우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이다. 박물관과 오래된 항구, 광장과 시장을 걸었고, 바틱 장인의 손끝과 사만춤의 리듬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저는 이곳에서 다른 문화 앞에서 겸손해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서둘러 판단하지 않고,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간을 누리는 법도요.”바틱, 천 위에 쓴 시사공 교우가 가장 사랑하는 인도네시아 문화는 단연 바틱(Batik·바틱용 왁스 ‘말람’으로 천에 무늬를 그려 염색하는 전통 예술)이다. 화려한 무늬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의 눈에 바틱은 세계관과 삶의 질서가 새겨진 기록이다.“바틱에는 태어남과 결혼, 부모의 마음, 공동체의 약속과 자연에 대한 존중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틱을 ‘천 위에 쓴 인도네시아의 시’라고 부릅니다.”시인인 그에게 시 역시 비슷한 의미다.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꾸미는 글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고 조용히 귀 기울인 끝에 비로소 찾아오는 언어, 세상을 향해 말하기 전에 먼저 귀 기울이는 언어다.문화는 소비가 아니라 이해다“문화는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타문화를 이해할수록 자신의 세계가 넓어집니다.”1999년,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교사였던 사공 교우는 ‘문화탐방반’을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유명 관광지 대신, 누군가의 삶이 이어지는 ‘진짜 인도네시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문화탐방반은 이후 교민 대상 프로그램으로 확대됐고, 마침내 지금의 한·인니문화연구원으로 이어졌다.이렇듯 낯선 땅에서 소통의 가교를 놓아온 그이기에, 최근 들려온 몽골인 중심의 몽골교우회 창립은 더욱 뜻깊게 다가왔다.“한국에서 공부한 외국인 교우들은 한국과 자국을 모두 이해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앞으로 이런 해외 현지인 교우회가 학술과 문화, 경제를 잇는 실질적인 네트워크로 성장하길 바랍니다.”사공 교우는 한 가지를 덧붙였다. 한국을 알리는 것만큼 현지의 문화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이다.“진정한 가교는 한 방향으로만 놓이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배우고,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완성됩니다.”“그 땅을 더깊이 사랑하기 위해”인도네시아는 그에게 여전히 새롭게 다가오는 나라다. 우기가 시작될 무렵의 하늘, 순다 끌라빠 항구에 정박한 오래된 삐니시 범선, 해질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만 들어도 그의 마음은 다시 흔들린다. 사공 교우는 현재 자카르타의 골목과 광장, 항구와 박물관을 담은 『자카르타를 산책하다』를 준비하고 있다.“너무 빨리 적응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곳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보세요. 언어를 배우고, 시장을 걷고, 현지 친구를 만나고, 오래된 길을 찾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나라는 또 하나의 고향이 됩니다.”그리고는 35년의 삶을 한 문장으로 갈무리했다.“나는 인도네시아에서 무릎 꿇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내 안의 오만을 비워내고 마음을 여는 일이었습니다.”모교 CCL에서 강연 중인 사공경 교우인도네시아어로도 번역된 시집 <불멸의 테이블>삐니시*2-누산타라의 배나무 한 그루가 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누산타라**의 바다를 꿈꾸면서그 이름, 삐니시희망봉 너머 먼 대양을 건넜구나부기스의 손길로 시간을 새기고비라의 점성술로 돛을 펼칠 때바람과 함께 걸으며길을 잃지 않았다용골을 다듬으며 기도를 올리고하얀 수탉의 피로 안녕을 빌며목재마다 깃든 전설을 엮어한 올 한 올 역사가 되었다울린의 강인함으로 물결을 헤치고티크의 아름다운 결로 태양을 품으며므란띠의 넉넉한 가공성으로그대, 거친 파도 달래며 하나 되는물과 나무의 연대기진수의 날염소와 소의 다리를 배에 걸어두며천 년을 달리길 기도했지삐니시여!네가 가는 곳마다바람의 전설을 말하리라-시집 <불멸의 테이블> 中*삐니시(Pinisi): 부기스와 마카사르 종족이 만든 전통 범선으로 수 세기 동안 향신료의 길을 달리며 바다 위 문명을 노래했다. 군도와 대양을 잇는 살아있는 해도(海圖)로, 세계 범선 항해 기술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2017)로 등재되었다.**누산타라(Nusantara): 인도네시아 전체 군도를 아우르는 고유 명칭.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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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교우회 최초의 현지인 교우들로 구성된 몽골교우회가 정식으로 출범하며 글로벌 교우 역사의 큰 걸음을 내디뎠다. 이 역사적인 출발의 중심에는 모교에서 배 운 학문과 고대 정신을 바탕으로 몽골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가고 있는 몽골교우회 임원단이 있다. 머나먼 한국 땅, 그중에서도 안암의 교정을 선택했던 특별한 계기부터, 가슴 터지도 록 열정적이었던 고연전의 추억, 그리고 앞으로 몽골교우회가 현지에서 피워낼 새 로운 희망과 개인적인 꿈까지.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하며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몽골 교우회 임원들의 출사표를 담았다.글. 김수린·서윤주·주가윤 기자 사진. 진서영 기자모교에서 얻은 자산, 몽골 사회와 후배들에게 이어갈 것에르덴다바(건축·사회공11) 몽골교우회 초대 회장Eeltei Zam LLC 대표이사어릴 때부터 건설과 도시 인프라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해외 유학을 결심했다. 한국은 짧은 기간 동안 눈부신 경제성장과 도시개발을 이룩한 국가다. 특히 건설 및 인프라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여러 대학을 신중하게 검토한 끝에 모교 건축사회환경공학과를 선택했고, 모교의 우수한 교육 수준과 글로벌 네트워크는 거대한 기회의 장을 열어 주었다.
낯선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유학 초기에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학과 교수진과 친구들의 따뜻한 도움 덕분에 빠르게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처음 안암 캠퍼스에 도착했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학생들의 뜨거운 열정이었다. 밤늦게까지 도서관을 환하게 밝히던 동기들의 모습, 그리고 안암 캠퍼스에서 온몸으로 체감했던 응원전과 축제 문화는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때 경험한 역동적인 에너지는 훗날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유연하게 연결해야 하는 몽골교우회장 역할을 수행하는 데 소중한 밑거름이 됐다.모교에서 얻은 가장 큰 자산, 문제 해결 능력과 글로벌 시각
재학 시절 수행했던 전공 수업과 연구 프로젝트들은 학문적 기반을 다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석사 과정 동안 사회기반시설을 대상으로 한 실제 연구를 수행하며 이론과 현장을 연결하는 법을 몸소 익혔다.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능력,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하는 역량, 그리고 글로벌한 시각을 갖추게 된 것이야말로 모교에서 얻은 가장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동기들과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면서,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친구들로부터 서로 다른 관점과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이처럼 고대에서 체득한 복합적인 문제 해결 능력과 세계를 바라보는 넓은 시각은 인생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현재 ‘NTM Holding LLC’에서 Senior QA Engineer로 근무하며 대형 건설 프로젝트의 품질 관리 업무를 총괄하고 있으며, 도로 인프라 관련 기업인 ‘Eeltei Zam LLC’의 대표이사로서 경영에 매진하고 있다.“몽골에 오시면 언제든 자랑스러운 고대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번 몽골교우회의 공식 창립은 몽골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면서도 서로 연결될 기회가 적었던 교우들을 직접 찾아 나선 노력의 결실이다. 현재 몽골교우회에는 건설, 광업, 금융, IT, 무역 등 다양한 산업군과 세대를 아우르는 몽골인 교우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현지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교우들까지 함께 어우러지는 풍성한 공동체로 성장했다.
지금 몽골 현지의 교육 열기는 매우 뜨겁다. 한국 유학은 몽골 젊은 세대에게 글로벌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로 여겨지고 있으며, 특히 고려대학교는 우수한 교육 수준과 강력한 교우 네트워크를 갖춘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과 몽골 두 나라의 문화를 모두 깊이 이해하는 몽골인 교우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점은 우리 몽골교우회만이 가진 뚜렷한 강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점을 활용해 임기 내에 공식 네트워크를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강화하는 한편, 정기 세미나와 모교로 유학을 떠나는 후배들을 위한 멘토링 프로그램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한국에 있는 우리 교우들이 몽골을 방문하신다면 언제든 버선발로 나서서 따뜻하게 맞이하겠다. 칭기즈칸의 대륙 몽골에서, 고대라는 자랑스러운 이름 아래 우리 모두 함께 교류하고 협력하며 성장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고대정신으로 몽골 유통망과 나눔 생태계 구축 아리온졸(경영12) 몽골교우회 부회장노민홀딩(Nomin Holding LLC) 전략사업 개발부 경영 개발 매니저모교와의 인연은 ‘예쁜 캠퍼스’로부터 시작했다. 한국 유학을 결심하고 모교 면접을 보러 온 어느 날, 미디어관의 면접실 유리창 너머로 보인 캠퍼스의 모습은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곳처럼 멋지고 신비로웠다. 그 순간 모교에 마음을 빼앗겼고, 꼭 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지금도 어쩌다 가끔 서울로 출장 가게 되면 꼭 캠퍼스를 들른다. 고연전, 가장 뜨거운 기억 밤을 새워 공부한 것도, 선후배 간의 동료애를 느낀 것도 기억에 남지만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은 고연전이다. 특히 5종목을 모두 압승한 2014년 가을, 안암동에서 열린 축제는 그 어떤 축제보다도 행복했다.
최근에는 동계올림픽에서 김길리 교우가 금메달을 땄다는 뉴스를 보고 고대인으로서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졸업 후 몽골로 돌아와 시작한 일은 경영 개발 매니저 업무다. 주로 대기업 구조의 그룹 지주사에서 전략 및 재무 관련 업무를 맡거나, 자산운용사 투자분석 업무를 맡아왔는데, 다양한 사람들과 매일 협업하며 넓은 시야를 갖고 일하는 방식을 즐기게 됐다.
현재는 몽골에서 제일 많은 유통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리테일 그룹 노민홀딩(Nomin Holding LLC) 전략사업 개발부의 Business Development Manager(경영 개발 매니저) 업무를 맡고 있다. 시내를 걷다 내가 참여했던 사업 프로젝트 점포 옆을 지나갈 때면, 내가 이곳에 이바지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모교 후배 위한 장학·자선사업 구축할 터 이번에 새롭게 창립된 몽골교우회 부회장이라는 소임을 맡게 되면서 교우회 활동에 대한 기대와 책임감도 크다. 앞으로 몽골교우회가 모교를 졸업한 몽골 유학생들, 그리고 몽골에서 직장을 다니며 거주하고 있는 모든 모교 졸업자의 든든한 커뮤니티를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나아가 몽골로 출장 오는 교우들까지 포함해서 정기적으로 서로 네트워킹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구축하고자 한다. 활발한 교우회 활동을 위해 교우들의 참여가 가장 중요한 만큼, 앞으로 계획할 모든 활동이 최대한 많은 졸업자를 포괄할 수 있도록 교우 DB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관리하는 데 우선 많은 시간을 투자할 예정이다.
학창 시절 모교에서, 그리고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았던 고마운 경험이 있다. 앞으로 그 따뜻한 경험을 바탕으로 몽골 교우들이 직접 참여하는 장학사업을 개설하고 그 기반을 단단히 다지고 싶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몽골 학생들을 지원하는 사업이나 모교에 재학하고 있는 몽골 유학생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 등이다. 또한 안암에서 배우고 다진 고대 정신을 삶의 이정표로 삼아 몽골 사회에 건강한 자선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 장기적인 목표다. 최종 목표는 나의 할머니를 기념하며 장학 또는 특정 연구를 지원하는 자선 활동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몽골은 아직 자선활동이나 장학 제도가 보편적이지 않아, 이러한 장학 생태계를 꼭 구축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몽골교우회의 역할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사람을 잇는 일이 나의 길이 됐다 박영광(엘흐메·정외17) 몽골교우회 창립준비위원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객원해설사몽골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성장했다. 2010년 처음 한국에 온 뒤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검정고시와 부산국제고등학교를 거쳐 모교 정외과에 입학했다. 낯선 언어와 제도 속에서 시작한 한국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2022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지금, 나는 몽골과 한국이라는 두 세계를 모두 품고 살아가고 있다.
모교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서 시작됐다. 당시에는 선생님께서 왜 그토록 고대를 추천하셨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안암에서 보낸 학부와 대학원 7년 반의 시간은 내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고대는 단순히 전공 지식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었다. 몽골 출신이라는 배경, 이주 경험, 언어 능력, 그리고 사람을 연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곳이었다. 사람으로 남은 모교의 기억 대학 생활 동안 가장 크게 남은 기억은 사람이다. 질문하고 토론하며 교수님과 동료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연을 만났다. 친구들 사이에서 “고대에서 엘흐메를 모르면 간첩이다”라는 농담을 들었다. 고대 공동체 안에서 혼자가 아니었다는 따뜻한 기억이다. 물론 모든 순간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외국에서 온 사람으로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느낄 때도 있었고, 때로는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선배들의 조언으로 용기를 얻었고, 친구들과 후배들을 통해 소속감을 느꼈다. 나에게 고대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어려운 순간에도 서로를 끌어주고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몽골교우회, 연결의 구심점 될 것 현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외국인 객원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영어, 몽골어, 러시아어로 설명한다. 또한 법무부 이민자 사회통합프로그램 멘토로서 한국에 정착한 이민자와 다문화 배경의 사람들에게 나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의 중심에는 늘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이 있다.
이번 몽골교우회의 결성은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일이다. 몽골 출신 고대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동안 서로를 지속적으로 이어줄 공식적인 구심점은 부족했다. 몽골교우회가 재학생과 졸업생을 잇는 다리가 되고, 나아가 한국과 몽골, 모교와 몽골 사회를 연결하는 국제적 네트워크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2026-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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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아시아 양 대륙 사이로 흐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배경으로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고대를 잇다김성렬(독문73)고대교우회 유럽총연합회장사막의 한밤중, 선배들이 구워준 양갈비 한 점의 온기를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낯선 타국에서 건네받은 고대인의 정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 유럽 교우사회를 잇는 힘이 됐다. 실크로드의 종착지 이스탄불에서 무역인으로, 유럽총연합회장으로 살아가는 김성렬 교우를 만났다.글. 이현화 선임기자실크로드의 끝에서 한국을 알리다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는 김성렬(독문73) 교우. 그가 이스탄불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1년 2월, 효성물산의 튀르키예 초대 지점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당시 그는 화학섬유 원사부터 직물까지 수출했는데, 소위 ‘인조실크’라 불리며 대히트를 쳤다.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이자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던 이스탄불에서 거둔 성과였기에 의미는 더욱 남달랐다.“마치 15세기에 중단된 실크로드가 다시 부활한 것 같았죠. 지금 생각해도 신이 납니다.”김 교우는 해외 진출의 최전선에서 젊음을 불태웠다. 당시만 해도 ‘메이드 인 코리아’는 저가 공산품의 이미지가 강했지만, 오늘날 한국은 첨단 기술과 문화, 산업 전반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는 나라로 성장했다. 그 변화의 한복판에 그가 있었다.“형제의 나라 튀르키예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산제품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30년째 이스탄불을 떠나질 못했나 봅니다, 하하.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도시입니다.”보스포러스 해협의 물빛을 바라보며 이스탄불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김 교우.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러스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색을 바꾸며 동서양이 만나는 도시의 풍경을 완성한다.사막에서 만난 고대인의 정김 교우는 1989년, 쿠웨이트로 첫 해외 발령을 나갔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 5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모든 것이 낯설고 막막했다. 그때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모교 선배들이었다.“한밤중, 쌀쌀한 걸프만 바닷가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작은 바비큐파티를 열었어요. 그때 선배들이 구워주신 양갈비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타국에서 만난 고대인의 정은 훗날 그가 교우회 활동에 헌신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선배들에게 받았던 온기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자연스런 마음이었다.2009년 4월 1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린트 호텔에서 유럽교우회총연합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기수 당시 모교총장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독일·영국·프랑스 등 각국 교우회가 뜻을 모아 유럽총연합이 공식 출범했다. 초대 회장은 양해경(경영66) 교우가 맡았다. 이후 유럽총연합은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을 순회하며 총회를 개최했다. 각 지역 교우회 소속 교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모교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장이었다. 양해경 초대 회장에 이어 임시창(철학69) 영국교우회장이 제2대 회장을 맡아 조직의 기반을 다졌고, 현재는 김성렬 회장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사막에서 선배들에게 받았던 따뜻한 격려는 이제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의 교우들을 잇는 힘이 됐다.이제는 내가 다리를 놓을 차례“이제 해외 교우회는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 글로벌 고대의 네트워크로 발전해야 합니다.”김성렬 교우는 ‘지속가능한 해외 교우회’를 앞으로의 과제로 꼽았다. 유럽교우회 상당수가 주재원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구성원의 교체가 잦아 조직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모교의 국제화가 가속화되는 만큼 외국인 교우들과의 연대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국적은 달라도 모두 고대인입니다. 해외 각지의 외국인 교우들이 모교에 대한 자부심을 이어갈 수 있도록 더 적극적으로 연결해야 합니다.”최근 총교우회와 모교의 유럽 방문도 반갑게 지켜보고 있다. 해외 교우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모교와 현지 교우들을 다시 이어주는 계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인터뷰 말미, 그는 세계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시선을 돌렸다.“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사람 사는 곳은 결국 같습니다. 교문을 나설 때마다 ‘이제는 세계를 향해서’라는 생각을 품었으면 좋겠습니다.”1989년 쿠웨이트의 사막에서 선배들의 따뜻한 격려를 받았던 젊은 주재원은 어느덧 유럽 교우사회를 이끄는 회장이 됐다. 타국에서 받았던 온기를 잊지 않았기에, 이제는 그 온기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려 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처럼, 김성렬 교우 역시 오늘도 세계 곳곳의 고대인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있다.튀르키예 교우들과 함께한 보스포러스 해협 크루즈. 돌고래들의 에스코트 속에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202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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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콜니밋 락시나(24법전)태국 행정법원 행정사건 담당관“때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태국에서 정의를 꿈꾸는 젊은 법조인“때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태국과 한국의 법학 석사 학위를 모두 취득한 몽콜니밋 락시나(24법전) 교우는 모교에서 행정법을 전공한 경험을 토대로 모국인 태국에서 신속한 정의 실현을 꿈꾸고 있다. 글. 주가윤 기자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A. 안녕하세요, 몽콜니밋 락시나(Mongkolnimit Raksina)입니다. 제가 아마 한국에서 행정법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태국인일 거예요. 태국 출라롱콘(Chulalongkorn) 대학교에서 정치학부를 전공한 뒤 같은 동대학 로스쿨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고려대학교에서 행정법석사학위를받았습니다.Q. 이미 모국에서 로스쿨을 졸업했는데도 모교 로스쿨에 진학한 계기가 있나요?A. 학부 졸업 후 태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기획정책분석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한반도 관련 안보 정책과 지정학적 상황을 분석하는 업무를 담당했어요. 한국 정부기관의 초청으로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며, 공공 시스템과 행정 효율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모국에서 법학을 공부할 때 한국 공법이 국가 발전과 거버넌스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관심이 생겨 모교 로스쿨을진학하기로결정했어요.Q. 해외에서 석사 과정을 밟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A. 한국 로스쿨에 진학한 것은 저에게도 매우 큰 도전이었기에, 그만큼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가장 큰 장애물은 언어장벽이었습니다. 특히 종합시험을 준비할 때는 방대한 한국어 교재를 소화하기 위해 큰 헌신과 인내가 필요했죠. 다행히 지도교수셨던 이희정 교수님께서 무한히 지지해 주신 덕에 무사히 석사과정을 마칠 수있었습니다.Q. 현재 태국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A. 행정법원에서 행정사건 담당관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최고행정법원 재판부 재판장을 보좌하며 판결문 및 결정문 초안을 검토하는 게 제 업무예요. 법조인으로서 경력이 아직 짧은 만큼, 선임 전문가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약 8년에서 10년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경험을 쌓은 후 행정법원 판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는데, 언젠가 판사가 된다면 불필요한 지연 없이 효율적으로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헌신하고 싶습니다. 락시나 교우가 근무하는 태국 행정법원Q. 모교에서의 배움이 도움이 되었던 적이 있나요?A. 법원 근무를 시작한 해에 개인정보보호법 관련 사건을 지원하는 업무를 배정받았습니다. 태국에서는 개인정보보호법이 비교적 최근에 시행된 만큼 참고 자료가 부족했고, 해당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인력도 많지 않은 상황이었죠. 다행히 석사 과정에서 개인정보보호법을 공부했던 덕분에 담당 판사가 사건을 원활히 처리할 수 있도록하는 법리적 논거를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학문적인 배움뿐 아니라, 모교에서 체득한 ‘고대정신’은 지금도 저에게 큰 격려가 되고 있어요. 동기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강한 지지, 협력과 공동의 목적 의식 같은 것들이요. 모교에서의 배움과 경험은 사회적 책임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든든한 기반입니다.Q. 태국에서도 ‘고대생 느낌’이 나온다고 느낀 순간이 있을 것 같은데요.A. 특히 어려운 순간마다 ‘고대생느낌’을 깊이 체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모교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강한 회복력과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의지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다짐하고 최선을 다해 극복하되,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경험으로 삼아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데에 집중하죠.Q. 마지막으로 재학생과 교우들에게 조언 부탁드립니다.A. 우리는 과거의 원칙과 경험에서 배우고, 그것을 현재에 적용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배웁니다. 역경을 극복하는 데 힘이 되는 희망와 영감이 현실에서 구현되려면 꾸준한 노력과 실천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헌신적으로 학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지식을 나누며 다양한 학문 사이에서 통합적으로 협력한다면 혁신을 이끌고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끄는 ‘글로벌 리더’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락시나 교우는 ‘포기하지 않는’ 고대정신을 강조했다.
2026-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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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을(정외76) 국가보훈부 장관보훈은 남 이야기 아닌 우리 모두의 역사가난과 분노 치유해 준 모교교정에 ‘호국영웅명비’ 세워지길국가보훈부 장관 권오을(정외76) 교우는 “보훈은 국가가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 대한 정당한 예우”라고 단언했다. 글. 최기영 주간 사진. 진서영 기자국격에 걸맞은 예우, 국가의 책무“국가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우리 모두의 역사입니다.” 권 교우가 정의하는 ‘호국보훈의 달’의 핵심 메시지다.그러면서 그는 보훈을 ‘국가의 시혜’로 보는 관점을 강하게 경계했다. 공동체를 위해 몸과 삶을 바친 이들에 대한 합당한 예우와 보상은 국가의 최소한의 책무라는 것이다. 다만 현재 우리의 보훈 예우 수준은 우리 경제 규모에 비해 아직 미흡하다고 말했다.“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와 수출 5대 강국이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훈 정책도 이러한 국격에 걸맞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합니다. 현재 국가예산의 약 0.9% 수준인 보훈 예산을 최소한 1% 이상으로 확보해야 합니다.”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 예우와 제도가 뒷받침될 때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보훈의 가치를 왜곡하거나 역사적 아픔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히 비판받고 제재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디지털 시대 ‘기억’과 ‘예우’의 방식권 교우는 AI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기억과 예우를 제시했다. 독립운동가, 6·25 참전용사, 민주유공자들의 젊은 시절 모습과 목소리를 복원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 주목하고 있는 것. 독립운동가들의 수형 사진 복원, ‘세상에서 가장 늦은 졸업식’과 같은 디지털 콘텐츠 제작, 해방 시기 만세 소리 재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를 시청각적으로 되살리는 시도가 젊은 세대와의 접점을 넓히는 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더불어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공적 심사를 디지털화하고 AI 딥러닝 기술을 도입해, 국가유공자 보훈 심사 기간을 기존 보다 단축함으로써 신뢰도를 높이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보훈에는 좌우가 없다” – 국민통합의 보훈 독립·호국·민주라는 보훈의 세 축은 어느 하나도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는 동일한 가치임에도, 그동안 진영 논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려 온 탓에 보훈 인식의 차이를 낳았다는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정파를 초월해 전직 대통령과 영부인의 묘역을 공식 참배하고, 대통령 명의의 화환을 전달하는 등 통합의 보훈을 실천해 왔다. 아울러 참전 유공자 배우자 생활지원금 신설, 독립유공자 후손 보상 확대, 민주유공자법 제정 추진 등을 전방위적으로 병행하는 것이야말로 보훈을 통한 국민통합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모르니까 먼저 주자” – 독립유공 서훈의 패러다임 전환“독립유공 서훈 과정에서 ‘행적 미상’을 이유로 훈장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확인되고 일정 기준을 충족한다면 예우를 미루지 말고 먼저 서훈을 해야 합니다. 나중에 명백한 취소 사유가 드러나면 그때 바로잡으면 됩니다.”민주유공자법 제정을 통해 이한열·박종철·전태일 등 민주열사들을 ‘열사’라는 호칭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국가가 공식 인정하는 ‘유공자’로 예우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의 확고한 소신이다.권 교우는 임기 중 ‘보훈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꼽았다.“6·25 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한 유공자의 배우자, 특히 미망인분들은 그동안 보훈의 가장 큰 사각지대였습니다. 당시 부상자나 전사자의 경우 연금과 보훈병원 감면 혜택을 받지만, 일반 참전유공자 배우자에게는 제도적 보호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이에 따라 보훈부는 2026년 3월부터는 80세 이상, 중위소득 50% 이하 참전유공자 배우자 약 1만 7,000여 명에게 월 15만 원의 생계지원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권 교우는 대상과 지원 수준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모든 미망인 배우자가 혜택을 받도록 하겠다고 밝혔다.독립운동가 3대의 삶을 바꾸는 보훈 권 교우는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기일 선생의 후손 이야기를 했다. 일제강점기 막대한 가산을 모두 정리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권기일 선생의 손자는 현재 안동에서 택시 기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손자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부유하고 편하게 살았을 텐데, 우리 3대가 이렇게 힘들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씁쓸한 심정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권 교우는 “이제는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서글픈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뒤늦게라도 후손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줄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 합당한 보상이 이뤄지는 보훈을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3대까지 보상을 하되 3대 이후 뒤늦게 선대의 독립공적이 인정되면 그때부터 최소 2대는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게 됐다는 것이다.“모교에서 배운 건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 눈”정외과 76학번으로 모교에 입학한 권 교우의 젊은 시절은 사회 구조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으로 가득차 있었다. 집안 사정 변화로 학창 시절 공납금을 내기도 어려웠던 그는 마음에 부유층과 기득권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 2학년 어느 여름날, 같은 과 친구가 던진 “언제까지 프롤레타리아 계급만 대변할래?”라는 한마디는 그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그 질문을 계기로 정당한 기득권을 인정하는 법을 배웠고,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것이 고대가 내게 준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었습니다.”“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마음의 고향”‘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마음의 고향.’ 권 교우가 교가를 부를 때마다 유독 가슴이 뭉클해진다는 구절이다. 가난과 분노의 시절을 지나 세상을 향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모교는 그에게 말 그대로 ‘마음의 고향’인 셈이다. “우리 세대가 재학 시절, 교정에서 ‘만주 땅은 우리 것 태평양도 양보 못한다’며 호연지기를 노래했다면, 지금의 후배들은 이미 태평양을 넘어 인류와 우주를 무대로 활약하는 세대 아닙니까. 지구를 넘어 인류와 우주까지 아우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호국영웅명비, 모교에도 꼭 세워야인터뷰 말미, 권 교우는 모교를 향한 제안을 남겼다. 바로 교정 안에 호국영웅명비(護國英雄名碑)를 반드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전쟁의 위기 속에서 수많은 고대생들도 교정을 떠나 전장으로 향했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후배들이 일상 속에서 선배들의 희생을 자연스럽게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모교에 호국영웅명비가 세워지는 날, 저 역시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그 자리에 함께 서겠습니다."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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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광수(상학65) 삼양인터내셔날 회장버티고, 버티고,또 버텨라끈기와 겸손으로 걸어온 길1950년대 어느 날, 까까머리 소년이 공을 줍느라 분주했다. 명륜동 공터에서 아버지의 연습을 돕던 그날이 허광수(상학65) 교우와 골프의 첫 만남이었다.글. 이현화 선임기자 사진. 정태서 기자 타고난 ‘운동천재’“만능 스포츠맨이셨던 아버지 영향으로 다양한 스포츠를 접했습니다. 중학생 때 아이스하키를 시작해 모교 아이스하키부에서도 활약했죠.”허광수 교우는 1965년과 1966년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약했다. 국가대표의 영광도 누렸다. “학창시절 하면 대천수련원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아마 8월일 겁니다. 그 땡볕에 대천역에서 수련원까지 뛰어서 왕복하는데, 열외 안 당하려고 어찌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목이 말라 쓰러지기 일보 직전, 찰랑하게 고인 논물이 눈에 들어왔다. 스무 명 남짓한 부원들이 약속이나 한듯 뛰어들어 논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고. 대학교 2학년 때 입은 부상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아이스하키 대신 골프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불과 1년 만에 싱글 핸디캡 플레이어가 됐다. 더 놀라운 것은 골프로도 태극마크를 달았다는 사실. 1969년 제12회 한국오픈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로 출전, 짜릿한 우승을 차지했다.“1974년 한국아마추어선수권 우승도 기억에 남습니다. 대회 본부장이었던 아버지께서 직접 시상하셨거든요. 부자가 나란히 시상자와 수상자로 함께 섰으니, 아버지도 무척 기쁘셨을 겁니다.”‘미스터 골프’라 불렸던 故 허정구 명예회장(30법과)도 몰랐으리라. 훗날 막내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대한골프협회 회장과 영국왕립골프협회 두 번째 한국인 회원이 되리라는 것을.아이스하키 선수 시절 촬영한 <월간 동아> 화보1974년 한국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아버지(사진 왼쪽)가 시상한 우승컵을 들고선친에게 배운 겸손의 미덕허 교우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와 핑(PING)을 국내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한국 스포츠 산업을 성장시켰다. 그 기반에는 선친에게서 배운 ‘겸손의 미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늘 자신보다 남을 높이고 사람을 귀하게 대했던 모습을 또렷이 기억했다.“결국 오래 가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약속을 지키면 신뢰가 쌓이고, 사업도 결국 그 신뢰 위에서 이어지는 것이니까요.”그 철학은 사업 현장에서도 그대로 실천됐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동문으로 인연이 닿은 나이키 창업주 필 나이트(Phil Knight)와 국내 신발업체들을 연결하며 초기 나이키 생산 기반 구축에 힘을 보탰다. 하루 수백 켤레에 불과하던 생산은 이후 수만 켤레로 확대됐다. 한국에서 중국, 베트남으로 생산거점을 옮겨가며 20여 년간 사업을 키워냈다.골프 브랜드 핑의 성공도 마찬가지였다. 수년간 공들인 끝에 칼스텐 솔하임(Karsten Solheim) 핑 창업주는 “내 악수가 계약서보다 강하다”며 그에게 계약서도 없이 한국 총판권을 맡겼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40년 넘도록 이어지고 있다.모교에 더 헌신하라는 뜻으로이번 ‘자랑스러운 고대인’ 수상 소감을 묻자 허 교우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저보다 더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도 이런 큰 상을 주신 것은 앞으로 모교를 위해 더욱 헌신하라는 뜻으로 생각합니다.”평생의 지침으로 삼아온 겸손의 태도가 묻어나는 한마디였다.아시아태평양골프연맹 회장과 대한골프협회 회장을 맡아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힘써온 그는 모교 사랑에도 아낌이 없었다. 형과 함께 선친의 뜻을 기려 보헌장학기금을 조성했고, 고우체육회 회장으로서도 후배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기업 인사담당자들이 모교 출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끈기와 책임감, 신뢰와 협업은 모교 출신의 강점이자 사람을 움직이는 기본 가치입니다. 저 역시 인내하며 버텨낸 끝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후배 여러분도 어떤 길이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끝까지 가길 바랍니다.”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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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호(지질87) 에이스침대 대표이사 사장한번 시작하면 계속한다‘좋은 잠’을 만드는 사람화려한 수사보다 제품과 품질을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 안성호(지질87) 교우는 수십 년 동안 제조업의 기본과 사람에 대한 책임을 묵묵히 지켜왔다.글. 이현화 선임기자 사진. 정태서 기자장인처럼, 과학자처럼“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1993년, 한 광고 문구가 가구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단순한 가구였던 침대를 ‘수면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상징적인 명 카피였다. 그로부터 30여 년. 안성호(지질87) 교우는 여전히 제품과 품질, 그리고 사람을 먼저 이야기한다.“잘 생각해 보세요. 가구 중에 사람이 쓰는 건 침대와 의자밖에 없어요. 하루의 3분의 1은 침대에서 보내는데, 당연히 직접 누워 보고 사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람마다 체형도, 취향도 다르기에 침대는 반드시 직접 경험해 봐야 한다는 것. 에이스침대가 지금도 대형 오프라인 매장을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침대는 과학’이라는 철학은 지금도 유효하다. 국내 유일 국제공인시험기관인 ‘침대공학연구소’를 운영하며 성능 테스트와 수면 환경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안 교우 역시 공장과 연구소를 직접 챙긴다. 대학 시절에는 방학마다 공장일을 도우며 생산 현장을 익혔고, 입사 후에는 품질과 공정을 누구보다 집요하게 들여다봤다.한 번 시작하면 계속한다1992년 에이스침대에 입사한 안 교우는 2003년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IMF 외환위기와 경기침체 등 숱한 위기 속에서 ‘국내 대표 침대기업’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입사하고 4년 뒤에 IMF가 터졌습니다. 당시 부채 비율이 200%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핵심 사업만 남기고 부지런히 달린 결과, 5년 만에 빚을 다 갚았습니다.” 이후 안 교우는 핵심 소재 외주 생산을 최소화하고, 공장 자동화와 연구개발에 꾸준히 투자했다. 프리미엄 라인인 ‘에이스 헤리츠’ 역시 오랜 연구 끝에 내놓은 결과물이다.코로나 직전 중국 사업을 철수한 것은 ‘천운’이라 표현했다.“국내 생산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중국 공장을 정리하자마자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그는 선친의 뜻을 이어 재단법인 에이스경암재단 활동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1999년부터 이어온 백미 기부 사업은 올해로 28년째를 맞았다. 지금까지 전달된 쌀만 약 42억 원 규모다. 2003년 문을 연 ‘이천 에이스경로회관’ 역시 오랜 시간 지역 어르신들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돼왔다. 이 밖에도 루게릭요양병원 지원과 산불 피해 지원 등 도움이 필요한 현장마다 꾸준히 힘을 보태고 있다.제품 연구든, 사회공헌이든 한 번 하면 멈추는 법이 없다. 그가 담담하게 덧붙였다. “한 번 하면, 계속하는 게 좋잖아요.”아버지로부터 시작된 모교사랑안 교우와 모교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경영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은 부친 故 안유수(82경연) 회장의 졸업식이다. 웅장한석조 건물과 캠퍼스의 분위기가 어린 마음에도 인상 깊게 남았다.“아버지가 늘 모교를 좋게 이야기하셨어요. 선후배 관계가 끈끈하고 사람 냄새 나는 학교라고요. 자연히 모교를 동경하게 됐고, 사회에 나와 아버지의 말씀을 실감하게 됐습니다.”그는 후배들에게도 조급해하지 말라고 조언했다.“어떤 일이든 꾸준히 하면 됩니다. 유행을 좇기보다 원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십시오.”인터뷰 내내 그는 거창한 성공담보다 제품과 사람 이야기를 반복했다. 좋은 침대도, 오래 가는 기업도 결국 기본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1991년 설립된 국내 최초 침대 전문 연구시설이자국제공인시험기관인 ‘에이스침대공학연구소’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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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길(영문74)아주뉴스코퍼레이션 회장작은 도전으로 일군 거대한 변화타협보다 원칙으로 걸어온 40년 언론인곽영길(영문74) 교우는 40여 년간 언론인과 경영자로서 길을 걸었다. 평기자로 출발해 미디어 그룹을 일군 그의 여정은 단순한 개인의 성취를 넘어,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언론이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실천해온 과정이었다.글. 김수린 기자“수상은 개인이 아닌 함께한 시간의 결실”올해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상한 곽영길 교우. 그는 이번 수상이 개인의 성취라기보다 “함께 걸어온 시간과 사람들의 결실”이라고 강조했다. 한 사람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상이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인연과 헌신이 쌓여 있다는 의미다. 그는 이번 수상을 “앞으로 더 낮은 자세로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영문학과 74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고려대학교를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 소명”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하숙방과 막걸리집에서 이어지던 치열한 토론은 지금까지 그의 사고의 기반이 됐다. 그 과정에서 ‘지식’보다 ‘태도’를 배웠다.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자유롭게 질문하는 자세는 이후 언론인으로서의 기준이자 경영 철학으로 이어졌다.기자협회 축구시합에서 달리는 곽영길 교우기존의 틀을 넘어, 글로벌 미디어로평기자로 출발해 미디어 그룹을 일군 배경에는 ‘기존의 틀로는 급변하는 시대를 담아낼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불확실성이었지만, 자신이 만든 콘텐츠와 플랫폼이 사회에 의미 있게 작용하는 순간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곽 교우가 이끄는 아주경제는 5개 국어로 뉴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경제지다. 온라인 기사와 심층 기획, 포럼·콘퍼런스, SNS를 연계해 기사–영상–행사–소셜을 하나의 콘텐츠 생태계로 묶는 멀티플랫폼을 구축했다. 다언어 기반 경제신문과 1인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정보의 언어적·지역적 장벽을 허문 것이다. 곽 교우는 이를 “기술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방식”이라 설명하며, 글로벌 미디어의 역할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을 연결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중국 언론사들과 인터뷰하는 곽영길 교우“답은 결국 기본에”…언론인의 품격과 책임곽 교우가 오랜 시간 지켜온 원칙은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 그리고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며, 복잡한 문제일수록 답은 단순한 곳에 있다는 설명이다. 언론인의 품격 역시 이러한 원칙 위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지식이나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양심’ 이며,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묻고 그 답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끊임없는 공부와 자기 성찰이 더해질 때 비로소 언론인의 품격이 완성된다는 것이다.또한 모교 언론인의 강점으로 ‘균형감’과 ‘책임감’을 꼽으며 전체를 조망하려는 시각과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변화 속에서도, 본질은 흔들리지 않아마지막으로 그는 후배들과 교우들에게 한마디를 남겼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자신의 자리에서 매일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가장 큰 힘이 되며, 두려움보다 용기를, 타협보다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꿈을 스스로 제한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작은 도전이 축적되어 결국 큰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결국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곽 교우가 반복해 강조한 가치는 ‘본질’이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언론이 지켜야 할 기준이 무엇인지 다시금 환기시킨다.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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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프리드리히(바의공17)에를랑겐 대학병원 면역학 박사과정“호랑이도 춤을 춰”왼팔에 새긴 고대에서의 7년게임 중계로 시작된 한국어 사랑은 모교 진학으로 이어졌다. 모교에서 장학금을 받고, 모델·방송인으로 활약하며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 니키 교우. 팔에 새긴 응원가 가사처럼, 그의 청춘은 지금도 힘차게 춤추고 있다.글. 이현화 선임기자Q. 한국 생활 9년 중 7년을 고려대에서 보냈습니다.A. 독일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한국이 그리운 베로니카 프리드리히(Veronika Friedrich)입니다. ‘니키’라고 불러주세요! 모교에서 바이오의공학부 학사, 분자생명과학 석사를 마치고 현재 고향인 독일 에를랑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에를랑겐은 바이에른주에 있는 ‘대학도시’인데, ‘에를랑겐에는 지멘스, 대학병원, 대학생밖에 없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랍니다.Q. 에를랑겐에 지멘스헬시니어스 본사가 있잖아요. 바이오의공학을 모교에서 공부한 계기가 있나요?A. 실은 제가 게임을 좋아해요(웃음). GLS(글로벌스타크래프트 II 리그)를 보다 처음 한국어를 들었어요. 매우 ‘멜로딕’한 언어였죠. 압도적인 한국선수들의 실력, 경기장을 가득 채운 한국 관중을 보고 ‘저 나라에 가보고 싶다’고 결심했어요. 그렇게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하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답니다.모교가 명문대학인 건 잘 알고 있었어요. 타 대학 어학당을 다니면서 몇 번 캠퍼스에 놀러오기도 했고요. 그러다 모교에 바이오의공학부가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지원했죠! 말씀하신 대로 한국이든 독일이든 기회가 많을 것 같았거든요.Q. 한국어가 유창해서 공부할때 도움이 많이 됐을 것 같아요.A. 최고 등급인 TOPIK(한국어능력시험) 6급을 따기까지 반년 걸렸거든요. 저도 제가 한국어를 잘 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교양수업 첫 주부터 소위 ‘멘붕’이 오더라고요. 다행히 영어강의가 많아 구사일생했습니다. 그때부터 “힘들어” 하고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어요(웃음).모교에서 만난 '인생친구'들매년 손꼽아 기다린 입실렌티Q. 졸업 평점이 4.08이었잖아요? 2022년에 전과목 A+로 학장상도 받았고.A. 그건 외국인 전형 혜택이 컸어요.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장학금을 주는 제도가 있는데, 저도 몇 번 기회가 있어 감사히 받았습니다. 또 모교 열람실이 잘 갖춰진 덕분이기도 해요. ‘하스 노열(하나스퀘어 노트북열람실)’을 주로 애용했는데, 저보다 더 오래 앉아서 집중하는 친구들을 보니 자연스레 동기부여가 되더라고요.그리고 전공이 정말 좋았어요. 생명과학과 인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우는 과정이 즐거운 나머지, 매일 기대될 정도로요.Q. 모교에서 분자생명과학 석사까지 한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지금은 에를랑겐 대학병원에서 면역학 박사과정 중이라고요?A. 맞아요. 제 연구실은 혈액학 및 종양학과 소속인데요. 4세대 항암치료법인 CAR-T 세포치료를 연구하고 있고, 조혈모세포이식의 주요 합병증인 만성이식편대숙주병(cGvHD)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박사과정을 마치면 산업계로 진출할 계획인데요. 한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와 국제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싶습니다.Q. 공부하는 틈틈이 한국에서 모델과 방송인으로도 활약하셨는데, 그 전엔 내성적인 편이었다고 들었어요.A. 한국에 살고 고대를 다니면서 제 성격이 정말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늘 소심하고 제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많이 꺼렸습니다. 한국에서 모델·방송 활동을 하며 스스로를 표현하는 법을 배웠죠.독일에서는 한국 사람이 매우 성실하고 일을 잘한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모교에서 이를 직접 목격하고 저 역시 그 태도를 많이 배웠어요. 공부하는 것도, 힘든 것을 버텨내는 능력도요. 나름 외국인으로서 살아남으려면(?) 적극적일 수밖에 없더라고요.Q. 열심히 노력한 만큼, 모교가 많이 그립겠어요.A. 당연하죠. 입실렌티와 고연전의 열기, ‘과잠’을 입는 것, 개운사 길의 활기, 애기능 학생식당의 친절한 영양사 아주머니…. 무엇보다 모교에서 사귄 제 인생 최고의 친구들도요!그 모든 추억을 기억하고자 팔에 문신도 했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응원가 ‘Yeah Yeah Yeah’의 한 구절이에요. “호랑이도 춤을 춰.” 정말 귀여운 가사죠?Q. 에브리바디 세이 예예예~ 호랑이도 춤을 춰~ 알죠(웃음). 마지막으로 모교 선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A. 고대에서의 7년은 제 인생을 바꾼 시간이었어요. 어디에 있든 ‘고대생’이라는 이름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요. 독일에서도 교우 네트워크가 있다면 저도 기꺼이 참여하고 싶어요. 여러분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가장 좋아하는 응원가 한 구절을 왼팔에 새겼다.니키의 슬기로운 랩실 생활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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