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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를 기록하다> [25] 모교 영자신문 창간멤버민재식 교우의 1950년대 이야기 “중앙도서관 석탑의 우람한 모습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었다. 민재식이 중심이 되어 발행했던 학생 동인지의 이름도 《석탑문학》, 내가 주동이 되어 펴냈던 영자신문의 제호도 민재식의 제안으로 즉 ‘석탑’이라고 했다.”민영빈(영문51) 교우 회고록 《영어강국 KOREA를 키운 3‧8따라지》(2004)에 나오는 내용이다. 민영빈 교우는 1954년 창간한 모교 영자신문 의 초대 편집장이었다. 2018년 작고한 민영빈 교우와 같은 과 동기인 민재식(영문51) 교우는 영자신문 창간부터 시사영어사(현 YBM) 경영까지 평생을 함께했다. 피난시절 동인지 《석탑문학》 펴내“민영빈이는 황해도 해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6·25때 월남했고, 나는 전라도 화순군 이양면이 고향이에요. 김일성대학을 다니다 월남한 신일철(철학51)하고 민영빈이 친해졌고, 나하고도 친해져 셋이 평생 친구가 됐지요.”모교 철학과 교수로 도서관장, 문과대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한 신일철 교우는 2006년 작고했다. 민재식 교우는 광주사범학교를 나와 이양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51년 고려대에 입학해 광주의 전시연합대학인 조선대를 1년 다녔다. 1952년 교직을 그만두고 대구에서 하숙하며 원대동 임시교사에서 공부했다. 후배 이석선(법학52) 교우를 비롯해 몇 사람이 함께 하숙했다. 광주사범학교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던 민 교우는 1952년 석탑문학 동인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지훈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국문과 조지훈, 영문과 이호근, 교육학과(당시엔 철학과) 왕학수 교수 세 분이 단짝이었어요. 강의를 마치면 날마다 감나무집이라는 막걸리집에 가시는데 조지훈 선생이 따라오라고 해서 몇 번 갔어요. 마당에 평상이 있는 술집이었어요. 한 번은 아침에 깨어보니 이호근 선생 침대 밑이었던 적도 있었어요.”1953년 7월 《석탑문학》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다. 여기에 민재식 교우는 훗날 등단작이 되는 <속죄양>을 비롯해 시 2편을 발표했다. 동인 7명의 시 20편이 수록된 《석탑문학》은 고대 최초의 문학 동인지이다. ① 모교 영자신문은 1954년 창간했다가 중단된 후 1968년 라는 이름으로 복간했다. 사진은 라는 원래 제호로 다시 발간하기 시작한 1969년 3월 1일자 영자신문. ② 1953년 7월 대구 피난시절 나온 《석탑문학》 ③ 1953년 7월 8일 열린 《석탑문학》 출판기념회. 앞줄 가운데가 조지훈 교수, 맨오른쪽이 민재식 교우.70년 전 창간 1953년 휴전이 됐지만 본교가 안암동 교사로 돌아온 건 1954년 2월이다.“처음 학교에 와서 봤는데 기가 막히게 멋진 건물이었어요. 말로 듣고 사진으로 본 적도 있지만 실제로 보니까 너무 멋있어 내가 석탑에 매료된 거야. 지금도 학교 생각하면 석탑 건물이 떠올라요. 그래서 민영빈하고 만든 영자신문 이름을 ‘The Granite Tower’로 했을 거예요.”민영빈 교우는 회고록에서 1954년 7월 이화여대 영자신문 를 보고 영자신문 창간호를 만들었으며, 맨 앞에 인용했듯이 제호 는 민재식 교우가 제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제2호는 1954년 10월 15일자로 발행했다. 이후 월간으로 몇 번 더 발행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영자신문은 실물로 남은 게 없다.“타이프라이터로 만든 신문을 민영빈하고 둘이서 유진오 총장님한테 갖고 갔던 기억은 분명해요. 그런데 그때 내가 어떤 기사를 썼는지, 몇 번 더 냈는지는 모르겠어요.”모교 영자신문은 발행이 중단됐다가 1968년 9월 복간했다. 라는 제호로 네 번 낸 후 1969년 3월부터 원래 이름인 로 현재까지 발행하고 있다. 는 올해 창간 70주년이다.시인이자 T.S.엘리엇 연구자민 교우는 1955년 졸업 후 외자청(현 조달청)에 취직했다. 국제경쟁입찰을 통해 생필품을 수입하는 업무였다. 1956년 《문학예술》 3회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1960년 첫 시집 《속죄양》을 사상계사에서 출간했다. 같은 날 시집을 낸 박희진(영문50) 교우와 함께 합동출판회를 열었다. 민 교우의 시는 1950년대 한국 모더니즘 작품으로 연구되며, 영문과 김종길(영문46)‧김우창 교수 등의 번역으로 해외에 소개됐다.민 교우는 고대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해 1958년 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어로 작성한 이 논문은 T.S.엘리엇에 관한 국내 최초의 학위논문이다. 1961년 외자청을 나와 민영빈 교우가 운영하는 시사영어사에 들어갔다. 이후 1991년까지 30년 동안 일하며 편집장, 부사장, 사장을 역임했다. 민 교우는 시사영어사가 발간한 영어교육 도서와 잡지의 실무 책임자였다. 특히 그는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 공저 및 단독 집필자로서 다섯 차례 문교부 검정에 합격했다. 은퇴 후 민 교우는 새로 쓴 시와 T.S.엘리엇의 번역시를 책으로 묶어내고 있다. 민 교우는 요즘 자신이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시를 짓고 있다.“제목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인데 아직 완성하진 못했어요. 내 마지막 작품이겠지요.”전용호(국문86) 모교 박물관 특임교수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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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난 1월 김동원 모교총장이 하노이교우회를 방문했을 당시 크림슨보이스와 공연하는 모습. (아래 왼쪽) 지난해 하노이 고연전에서 응원단과 교우들. ③ 하노이한인국제학교 졸업 후 모교에 입학한 23학번 학생들에게 입학축하금을 전달했다. <해외교우 모임> 하노이교우회 다채로운 소모임 운영으로 교우회 활성화 도모타지에서 후배사랑 이어가며 교우 네트워킹 힘쓸 것비행기로 4시간이 걸리고, 시차는 2시간 느린 하노이. 워낙 잘 뭉치기로 유명한 고대인답게, 베트남의 심장이라 불리는 그곳에서도 교우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지난 1994년에 창립한 하노이교우회(회장 배용근·법학92)는, 지난해 제16대 회장으로 취임한 배용근 교우를 필두로 단단한 결속력과 다채로운 활동을 자랑하고 있어 현지 한인사회에서 부러움을 사고 있다.모교 인연 하노이서도 이어간다여느 교우회와 마찬가지로 하노이교우회에서도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운영하는데, 168명이 모인 채팅방에는 현지에 거주하는 교우들은 물론 한국으로 귀임한 교우들도 참여해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접 국가인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로 이주한 교우들, 또는 모교로 유학을 다녀온 베트남인 교우들까지 하노이교우회에 소속되어 활동 중이다.해외 교우회 특성상 대부분의 교우들은 공관 영사부터 시작해 공사 소속 공무원, 한국 기업 파견 법인장, 주재원, 현지 사업가, 자영업자, 교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민의 역사가 길지 않은 탓에 소속된 인원 역시 다른 교우회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적은 편임에도 많은 교우들이 재정을 후원하거나 재능을 기부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교우회를 지원하고 있다.각양각색 모임으로 더 끈끈하게하노이교우회는 다양한 색깔을 지닌 소모임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난해 봄에 창단한 밴드 '크림슨보이스'는 하노이교우회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면서 교우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 밖에도 ‘하노이고대골프단’은 정기 골프모임과 하노이 고연전 골프대회를 지원하면서 교우들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있다.성별과 연령대별 모임도 활성화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여자 교우들이 모인 여교우회 ‘PT(Pink Tigers)’는 일명 ‘Pretty Tigers’로 불리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80년대 학번까지의 교우들로 구성된 ‘GT(Golden Tigers)’, 그리고 90학번 이후 교우들의 모임인 ‘CT(Crimson Tigers)’ 역시 수시로 모여 단결력을 보여준다.한국으로 돌아간다 해서 교우들과의 인연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노이교우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다가 서울로 복귀한 교우들도 '하고서(하노이고대서울)'라는 모임을 조직해 타국에서의 인연을 지속하고 있으며, 현지 고등학교에서 모교로 진학한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돌아와 활동하기도 한다. 특히 하노이교우회는 전 세계 한인국제학교 중 학생 수가 가장 많은 하노이한인국제학교에 매년 방문해 졸업 후 모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축하금을 후원하고 있다.교우들의 든든한 버팀목 되길하노이교우회는 더 많은 교우들이 하노이교우회에 합류할 수 있도록 홍보 채널을 다각화하고, 고대교우회 및 모교와 함께 지역교우회의 활성화를 도모할 계획이다. 지난해 하노이 고연전에서는 크림슨보이스가 모교 응원단과 함께 응원전을 펼친 바 있으며, 또한 승명호 교우회장과 모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들이 지난해 하노이교우회를 찾았다. 올1월 김동원 모교총장이 동남아 순방 중 하노이교우회를 방문한 데 이어, 모교에서 교수진 및 학생들의 방문이 연달아 예정되어 있어 모교와의 연계를 강화할 계획이다. 내달 9일에는 하노이 고연전 연승을 위해 교우들의 화합과 실력을 다지는 차원에서 ‘제1회 재하노이고대교우회장배 골프대회’를 개최한다. 하늘빛 기자
20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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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31일에 열린 공과대학 설립 60주년 기념 캠퍼스 미래 포럼에 참여한 교우들과 재학생들. 고대미래포럼 “학과와 학번을 넘어서미래를 탐구하고 준비한다”고대미래포럼(회장 강전찬·법학81)은 ‘미래를 탐구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슬로건 아래 학과와 학번을 넘어선 교우 네트워크를 표방하는 모임이다. 교우들의 전문지식을 홍보하고 연결하여 전문가 및 교우들 간의 교류를 강화하고자 2017년에 설립됐다. 초기에는 디너토크 형태로 연사 초청 강연 및 발제를 진행했고, 이후 친목 도모를 넘어 교우들의 역량을 규합하는 데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지식 공유와 의견 교류, 미래 전망 및 전략 수립, 네트워킹 기회 제공, 사회경제적 이슈에 관한 논의의 네 가지 취지를 담아 포럼을 개최해왔다. 2024년 현재 회원 수 369명에 활동 정회원 수 153명으로 성장했고, 포럼 참석회원 중 90·00년대 학번이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2024년 제1회 정기포럼 열려그간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던 고대미래포럼은 2023년을 기점으로 분기별 정기포럼과 디너토크 형태로 진행되고 지난해 10월 31일에는 ‘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하는 창업 EXPO 캠퍼스 미래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격월로 홀수월 세번째(휴일인 경우 네번째) 수요일 저녁마다 산업별 특집형태로 개최되며 11월은 캠퍼스 미래포럼으로 재학생과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지난달 17일 제1회 정기포럼 ‘과학기술의 미래를 논하다’가 60여 명의 교우가 참석한 가운데 모교 신공학관에서 열렸다.첫 번째 강연 ‘지속 가능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인적, 물적 선결과제’에서 이해근(재료공83) 공과대학장은 ‘지속 가능한 자연계 학과 발전’을 강조하며 “대화형 토론과 혁신적인 솔루션을 통해 재정적 제약을 극복하고 교육의 질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진 강연 ‘Why, 기술창업인가?’를 발제한 장재수(전자공81) 고대기술지주 대표는 창업활성화를 통한 기대사항으로 신성장 동력 확보,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 육성, 지역 균형 발전을 강조했다. 현재 국내의 신규 창업 기업 수와 기업 가치가 1조원이 넘는 유니콘 기업의 사례를 분석하며 “연구자들의 기술 기반 창업이 국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 10월 31일에 열린 공과대학 설립 60주년 기념 캠퍼스 미래 포럼에 참여한 교우들과 재학생들. 참석자들 성원 이끌어내이날 행사가 끝난 후 교우들은 소그룹으로 나눠앉아 간단한 다과와 함께 네트워킹을 이어갔다. 박근영(건사환19) 재학생은 “예전 블록체인 학회에서 선배님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선후배간 도움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모임에서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주대선(행정03) 교우는 “고대미래포럼에서 교우들을 잇는 채널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회 공헌 활동도 계획하고 있어고대미래포럼은 교우 커뮤니티를 강화해 맞춤형 프로파일 및 매칭 서비스를 제공하고 네트워킹으로 협업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관련 내용이 담긴 뉴스레터를 발간 중이다. 향후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전환해 교육, 출판, 세미나, 컨설팅, 연구용역 등을 통해 교우들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교우 공동체 및 사회발전에 기여할 계획이다. 나아가 올해 11월에는 재학생들을 위해 창업 및 취업박람회 형태의 캠퍼스 미래포럼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고대미래포럼에 참여하고자 하는 교우는 홈페이지(www.kuff.kr)또는 네이버 밴드를 통해 회원으로 가입하면 된다. 정윤석 기자
202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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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조용만, 김효록, 이종우, 김경탁, 구자균, 이홍직, 손명현, 성백선 교수. 조용만 영문과 명예교수는 본보 1978년 8월호에 작고한 술친구 7인의 이야기를 회고했다. [22] 조용만 영문과 교수가 남긴주우(酒友) 7인 열전 1970~80년대 고대교우회보는 졸업생들이 궁금해하는 모교 소식과 함께 은사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게재했다. 특히 은퇴했거나 정년을 맞이한 교수들에게는 직접 회고록을 집필하게 했다. 한 회 게재로 끝내는 경우도 있고 7~8회 연재를 이어가신 분도 있다. 모교에서 20년 넘게 재직한 교수들의 회고록은 개인의 생애사를 넘어 모교 역사의 소중한 기록자료이다. 기회 닿은 대로 교수 회고록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연말을 맞아 조용만 교수의 ‘주우(酒友) 7인 열전’을 소개한다. 1953년부터 1975년까지 모교 영문과에 재직한 조용만 교수는 1978년 5월호부터 8월호까지 4회 동안 회고록을 게재했다. 그중 마지막 1978년 8월호에는 편집자와 독자의 요청이라며 작고한 술친구 7인에 대해 회고했다. 4년제 고려대 초창기에 재직했던 교수들의 인간적 면모를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술 잘 사주기로 유명한 김효록 교수“우곡(牛谷)은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이 항상 붉고 주량에 있어서는 당할 사람이 없다. 나는 대작하면 의례히 먼저 취해버려서 우곡이 취한 것을 본 일이 없다. 술을 잘 마실 뿐만 아니라 그는 술을 잘 사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 우곡이 주객으로서의 면목을 나타내는 때는 그의 득의의 창인 ‘노란 샤쓰입은 사나이’가 나온 뒤부터이다. 이 노래가 나온 뒤부터는 담론풍발, 좌충우돌로 일대 장관을 이루어서 통금시간이 가깝도록 통음하는 것이다.”우곡 김효록 교수는 1948년부터 상과대 교수로 재직하며 학장을 역임했다. 조용만 교수는 1972년 작고한 김효록 교수를 기리며 지은 시조 3수도 소개했다. 명철보신의 두 동서양 철학자이어 철학과 이종우 교수와 김경탁 교수 이야기. 두 사람은 전공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달랐지만 아침저녁으로 만나 같이 다녔으며 모두 보신탕을 좋아했다는 것, 특히 서양철학자인 이종우 교수가 한약 방면의 대가였다고 소개하고, 그들과 자주 술을 마셔도 취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술 마시는 사람들은 취후에 어쨌느니 하는 많은 일화를 가지고 있지만 명철보신(明哲保身)의 두 철학자는 술에 대한 아무런 일화나 후문이 없는 근엄한 사람이었다.”모교 제5대 총장을 역임한 이종우 교수는 1974년, 동양철학자 김경탁 교수는 1970년에 작고했다.술 깰 날이 없는 구자균 교수“아침부터 얼굴이 취해서 학교에 나와가지고 교수실로 돌아다니다가 술이 깰 만큼 되면 또 어디로 가서 한잔하고 들어오고 해서 술이 깨서 제정신을 가질 때가 거의 없었다.”조용만 교수는 《평민문학론》을 쓴다고 열심히 공부해서 기대가 컸던 구자균 국문과 교수가 1964년 술로 인해 너무 빨리 세상을 뜬 것을 안타까워했다. 술 깰 날이 없던 구자균 교수는 그러나 동료교수와 제자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그는 동료들 사이에 신의가 두터웠고 특히 후배들을 돌보는 점에 있어서 그 성의와 열성이 당할 사람이 없었다. 졸업생을 취직시키는 데 국문과가 제일이었는데 구자균은 머리를 싸매고 돌아다니면서 자리를 구해서 취직시켰다.” 최남선이 아낀 학자 이홍직 교수“술을 좋아는 하지만 결단코 폭주하는 법이 없고 절도있게 마시는 사람이어서 취해도 인사불성으로 전후불각일 때는 없었다.”조용만 교수는 사학과 이홍직 교수가 일본에서 오래 공부한 탓인지 술에도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육당 최남선을 숭배했고, 최남선 또한 이홍직 교수의 논문을 격찬했다며 오래 살았다면 좋은 논문을 많이 썼을 학자였다고 했다. 이홍직 교수는 모교 박물관장 재직 중 1970년에 작고했다.책과 술밖에 모르는 손명현 교수“그렇다고 무턱대고 마시는 것은 아니어서 친구들하고 어울려 마실 때에는 남들이 떠들어대고 어쩌거나 말거나 자기 마음대로 술을 따라서 혼자서 자꾸 마신다. 이래서 취하게 되었다고 짐작이 갈 때쯤 되면 술을 딱 끊고 슬그머니 옆자리에 누워버린다. 친구들이 신나게 마실 때에 그는 옆에 누워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다. (…) 술을 마시는 것은 기분이 좋아지자고 마시는 것인데 빨리 기분이 좋아져서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났으면 되었지 더 무슨 말이냐는 것이 그의 음주철학일 것이다.”조용만 교수는 손명현 교수를 ‘책과 술밖에 몰랐던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그의 학구열이 집약된 저서 《철학논고》를 언급했다. 손명현 교수는 1976년에 작고했다.대접에 소주를 들이켠 성백선 교수“여름이 되면 안동포 고의에 흰모시두루마기를 입고 합죽선을 들고 나타나는 사나이. 부의를 내는데 꼭 남의 곱절을 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나이. 술을 마실 때면 소주를 대접으로 벌떡벌떡 들이키어야지 술마시는 것 같다고 대언장어(大言壯語)하는 사나이.”심리학과 성백선 교수와 한동네 살았던 조용만 교수는 그가 새벽마다 약수를 뜨고 오는 길에 들러 한바탕 괘사와 익살을 떨고 갔다며 그리워했다. 성백선 교수는 1977년 작고했다.조용만 교수는 글을 시작하며 ‘관심응시주(寬心應是酒 : 마음을 너그럽게 하는 데는 응당 술이요)’라는 두보의 시구를 인용하고 “신산한 시절, 술밖에 의지할 곳이 없었다”라고 썼다. 6.25전쟁부터 70년대까지 혼란기를 함께했던 교수들과의 추억을 술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유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경성제대 영문과를 나온 조용만 교수는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으며, 영미문학 번역가였다. 1995년에 작고했다.전용호(국문86) 모교 박물관 특임교수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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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사발식을 진행하고 있는 풍경들. 맨 오른쪽 사진은 올해 미디어학부 사발식 모습. 원하는 사람만 자발적으로 참여해 한 잔씩 마셨다.모교의 음주문화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키워드가 바로 ‘사발식’이다. 사발식은 그동안 고대인의 통과의례처럼 여겨져왔다. 사발식의 정확한 유래와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60년대 학번 교우들이 당시에는 사발식이 없었다고 회고한 것을 참고할 때 대략 7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간 모교의 각종 행사에서 신입생을 대상으로 막걸리 찬가를 부르며 사발식을 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지만, 근래 과도한 음주문화가 비판받으며 사발식에 대한 인식 역시 변화했다. 재학생들은 사발식에 담겨 있는 의미는 남기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기획을 통해 사발식의 변화된 양상을 살펴보려 한다.사발식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사발식은 일제강점기 당시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종로경찰서 앞에서 민족의 울분과 함께 술을 토해내던 행동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출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는 해방 이후에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정신의 의미로, 민주화 이후에 자신이 버리고 싶은 것들을 씻어버린다는 의미로 발전해왔다. 그렇지만 사발식은 선후배가 함께 임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모교에 대한 소속감과 연대감을 돋우는 행사라 할 수 있겠다.그런데 왜 다른 술도 아니고 막걸리였을까.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학생들이 많았던 모교 특성상 과거 재학생들에게 가장 친숙했던 술이 막걸리였기 때문이다. 조용길(경영69) 교우는 고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았던 학생들에게 막걸리는 안주 없이 싼 가격에 마실 수 있는 최고의 술이었다”며 “시위현장에 나섰다가 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돌아온 날에도 동기 자취방에 모여 막걸리 술판을 벌였다”고 회상했다.부어라 마셔라 막걸리 취하도록그러나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선후배 관계는 수직적으로 변화했고, 사발식 또한 원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점점 폭력적이고 엽기적인 모습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사발식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은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차마 셀 수도 없는 양의 막걸리를 마시고 토해내는 것이 하나의 규칙으로 정착하기도 했다. 사발도 아닌 냉면 그릇에 두 병 정도 받아 마신 건 심각한 정도도 아니었다고 한다. 신발에 막걸리를 담아 마시게 했다든지, 막걸리를 마시다 토한 것을 다시 마시게 했다든지, 머리를 감거나 양말을 빤 술을 마시게 했다든지 등 그 양상도 다양하다.이렇다 보니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인터넷을 통해 사발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네이버 지식iN을 통해 작성된 '사발식' 관련 질문들을 검색하면, 많은 사람들이 사발식에 대해 저마다의 걱정을 뱉어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 자기는 고대를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신입생 환영회 때 사발식에 양말 빨고 가래 뱉고 먹인다 그러더군요.” _ 2007년 8월 20일“아, 그리고 고대는 사발식이란 거 한다고 들었는데, 뉴스에서도 보였듯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이는데, 진짜 강제로 막 먹이고, 안 먹는 사람 있으면 눈치 주고 그러나요?” _ 2016년 10월 5일“명목은 강제로 술을 마시고 토함으로써 스트레스 같은 거를 없앤다는데, 강제로 토하게 하는 것 자체가 미련한 짓거리 아닙니까? 이러한 술문화가 개선될 수는 없는 건가요? 아무리 전통이라도 더럽고 미개한 전통은 타파해야 되는 게 아닌가 싶네요.” _ 2017년 3월 22일예전과는 달라진 풍경이렇게 모교의 대외적 이미지에 생채기를 냈던 사발식은 2010년대에 들어서 새내기에게 술을 강요한다는 지적과 함께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강압적으로 진행된 사발식의 모습이 뉴스에 나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전국 각지에 있는 대학교에서 새내기들이 과음을 하다 세상을 떠난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그럼에도 사발식의 원래 취지는 유지하면서 진행 방식에 변화를 준 학과도 있다. 희망자에 한해 참여할 수 있도록 바꾼 바이오의공학부, 새내기와 함께 행사의 진행 여부부터 방식까지 논의한 언론학부와 정치외교학과, 그리고 주량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한 자유전공학부에 이르기까지. 이외에도 음주자에게는 사발이 아닌 컵이나 잔으로 마시도록 하거나, 비음주자를 위해 아침햇살이나 야쿠르트 같은 대체 음료를 준비하고 현장에서 본인이 마실 음료를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경우도 존재했다. 아무리 사발식이 문제 있다 하더라도, 고대인의 통과의례로서 갖는 위상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코로나로 대면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사발식의 존재는 거리두기가 해제된 후에도 고대인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일부 학과에서는 악습은 없애되 전통을 잇겠다며 사발식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과는 그렇지 않았다. 한편, 일찌감치 사발식을 폐지한 국어국문학과의 경우 지난 2월 새내기배움터에서 사발식의 역사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해 모교의 전통을 소개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사발식을 폐지한 이유를 설명하고, 건전한 음주문화를 만들기 위한 자치규약을 선후배가 함께 제정해 뒤풀이 시간에 적용하기도 했다.과거와 달리 이제는 사발식이 대부분의 과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선후배가 고대인으로서 하나가 되고자 했던 사발식의 진정한 의미를 기억하면서도 더욱 안전하고 건강하게 음주문화를 즐기는 것은 어떨까. 하늘빛 기자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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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제21대 모교총장 취임‘강한 고대’ 기대감 높여작년 12월 22일, 김동원(경영78) 경영학과 교수가 제21대 모교총장에 선임됐다. 임기는 2027년 2월까지 4년이다. 김동원 모교총장은 ‘강한 고대’를 위한 7대 추진과제를 공약으로 제시했으며, 2025년 개교 120주년을 앞두고 모교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4년만에 마스크 없는대면 졸업식·입학식2월 24일, 제116회 학위수여식에서 6268명의 새내기 교우가 배출되었다. 한편, 3월 2일에는 2023학년도 입학식이 개최되어 23학번 새내기 학생들이 모교 입학의 설렘을 누렸다. 올해 거행한 졸업식과 입학식은 4년만에 마스크 없이 전면 대면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의 회복을 실감케 했다. 한편, 입학식에서는 역대 교우회장 중 처음으로 승명호 교우회장이 격려사를 전했다. 정기고연전 2년 연속 우승3:2로 극적인 역전승 거둬 작년에 이어 2023 정기 고연전에서도 모교가 연세대학교를 3:2로 꺾고 종합 우승을 거두었다. 모교는 초반 야구, 빙구 두 경기 모두 패했으나, 이후 농구, 럭비, 축구에서 차례로 완승을 거두며 역전에 성공했다. 이번 우승으로 모교는 역대 정기전 종합 20승 10무 20패를 달성하며 추월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참살이길 무료주점은 50개소 이상이 개설됐고 승명호 교우회장이 작년에 이어 후배사랑 셔틀버스를 지원하며 재학생과 함께하는 교우회를 실현했다. 자랑스러운 고대인상 시상개교 120주년 기념사업 본격화 5월 5일, 제118회 개교기념식 및 고대인의 날이 모교 인촌기념관 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문규영(농학70) 아주그룹 회장과 이만득(경영77) 삼천리그룹 회장이 자랑스러운 고대인상을 수상했다. 한편, 개교 120주년을 앞둔 모교의 발전계획 및 비전에 대한 선포도 이루어졌다. 이어 7월에는 개교 120주년 기념사업회도 출범을 알렸다. 모교총장 역임한故 김준엽 선생 탄생 100주년독립운동가이자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모교 제9대 총장을 역임한 故 김준엽 선생의 탄생100주년을 맞아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김준엽 주간 행사가 개최되었다. 박물관 특별 전시회, 추모 문화제 학술대회 등 다양한 행사가 기획되었다. 교우회관, 교우들만의 안락한 공간으로 탈바꿈 지난 9월 말, 교우회관이 5층과 지하 1층의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더욱 쾌적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공사에 소요된 예산 40억여 원 전액은 승명호 교우회장의 기부금으로 충당됐다. 지하 1층 대강당은 최신 설비를 갖춘 공간으로 변모했으며, 교우회 사무처가 위치한 5층에는 교우들이 언제든 쉬어 갈 수 있는 라운지, 교우단체나 동아리 등의 모임을 위한 미팅룸, 다양한 행사를 위한 대회의실 등 교우들 간 화합의 공간이 새로 조성됐다. 이외 추가적인 리노베이션도 검토 중이다. 한국축구의 주축,고대 축구부 100주년올해는 1923년에 창단한 모교 축구부가 창단 100주년을 맞은 해이다. 모교 축구부는 한국 축구의 주축을 이뤄왔으며 올해 정기고연전에서 3:0으로 대승을 거두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친 바 있다. 이달 18일 용산 드래곤시티호텔에서 100주년 기념식이 개최될 예정이다.
202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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