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개교 12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특별전 ‘120년의 高·動, 미래 지성을 매혹하다’에서는 국가유산급 유물 120점이 엄선돼 전시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유물은 바로 한글로 기록된 최고본 ‘훈민정음’이다. 이 문헌은 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하고 1446년에 반포한 한글의 창제 정신과 원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자료다.
지구상 단 두 종,
훈민정음의 희귀성과 가치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문헌은 지구상에 단 두 종만 존재한다.
그중 하나는 한글로 표기돼 있지도 않다. 한글로 기록된 훈민정음은 ‘월인석보’의 서문 형식으로 첨부된 주해본이며, 경상도 풍기의 희방사에서 인쇄된 목판본이 현존한다. 반면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돼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해례본으로, 국보 제70호로 지정됐다.
고려대본의 독자적 특징과 역사적 단서
모교 소장본은 이 희방사본과 여러 면에서 차별된다.
첫째, 책의 제목이 ‘세종어제훈민정음’이 아닌 ‘훈민정음’으로 표기됐다. 이는 세종 제위 기간에 간행된 문헌임을 의미한다. 또한 고려대본은 “어졔예 ᄀᆞᆯᄋᆞ샤ᄃᆡ…”로 시작된다. 한글 창제 당시인 1443년 계해년에 제작된 최초 판본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우리가 익숙한 “나랏말ᄊᆞ미…”는 후대에 의역된 표현이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정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고려대본은 “어졔예 ᄀᆞᆯᄋᆞ샤ᄃᆡ 나랏말소리 듕귁과 달라 문ᄍᆞ로 더브러 서르 흘러 통티 몯ᄒᆞ논 디라”로 시작된다. 이는 한문본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다. ‘말’과 ‘소리’를 구분하고, ‘문자’와 ‘흘러 통티’라는 표현을 통해 세종이 한자의 음과 뜻을 정확히 표기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고려대본은 1면과 2면이 붓으로 보사된 불완전본이다. 이 보사 작업은 숙종조의 학자 남학명(南鶴鳴, 1654~1722)이 수행한 것으로, 첫 면에 날인된 장서인을 통해 확인된다. 이후 이 책은 남학명의 증손녀를 통해 박승빈의 집안에 전래됐다. 박승빈이 1933년 ‘조선어학도서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대중에게 처음 공개됐다. 이후 행방이 묘연했지만, 1967년 육당 최남선의 소장서가 고려대에 기증되면서 다시금 발견됐다.
훈민정음 서문 원형 복원 입증
박승빈은 일본 궁내성 서릉부에 소장된 필사본 훈민정음이 자신의 가장본과 동일한 서문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두 문헌만으로는 남학명의 보사 내용이 원형을 반영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노경희의 ‘훈민정음(언해본) 필사본의 서지학적 연구’를 통해 제3의 문헌이 존재함이 밝혀졌다. 구한말 예문관 한림 서상집이 적상산성 사고에서 필사한 훈민정음 언해본이 서울대 일사문고에 전래돼 있는데, 이 역시 “어졔예 ᄀᆞᆯᄋᆞ샤ᄃᆡ…”로 시작된다. 이로써 고려대본, 일본 궁내성본, 서울대 필사본 세 문헌이 동일한 서문을 공유함으로써, 남학명의 보사 내용이 창작이 아닌 원형을 충실히 반영한 것임이 입증됐다.
고대 훈민정음, 국가유산으로서 정당한 자리매김 시급
이제 고려대 소장 ‘훈민정음’은 한글 창제 당시의 원형을 간직한 유일한 한글본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와 학술적 중요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이 문헌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언어 철학을 담은 결정적 증거다. 국가유산으로서의 정당한 보호와 자리매김이 시급한 것이다.
한적실 사서 구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