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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대를 세운 사람들
커버스토리·특집 편집국 2026-08-10 조회수 : 229


문과대학의 위대한 스승 

현상윤·조지훈·김준엽


1946년, 보성전문학교가 4년제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승격하던 그해, 초대 총장 현상윤은 문과대학을 본교 3개 단과대의 한 축으로 세우며 ‘민족 대학’의 밑그림을 그렸다. 그 위에 조지훈은 민족문화의 정신을 새겼고, 김준엽은 아시아를 향한 학문의 지평을 열었다. 80년이 흐른 지금도 세 명이 세운 기틀은 문학과 역사학, 언론과 무대, 교육과 출판 현장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교우들의 뿌리로 살아 있다.


글. 최기영 편집국장 

도움. 전용호(국문86) 고려대학교박물관 특임교수



문과대의 설계자, 현 상 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역사학자 기당(幾堂) 현상윤(1899~미상)은 보성전문학교 교수·교수부장을 지내며 보성전문에서 종합대학으로의 전환을 주도했다.


1946년 초대 고려대학교 총장을 맡았다. 그는 문과대학에 사학·국문·철학 등 인문학 기반을 다지며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인문학 교육을 통한 민족 정체성 확립을 강조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교훈 ‘자유·정의·진리’를 정립했다.


한국전쟁 초기 끝까지 학교를 지키다 납북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러나 그가 다져 놓은 종합대학의 기틀은 훗날 모교가 국내 최고의 명문 사학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1953년 그에게 수여한 박사학위는 모교 최초 박사 학위다. 건국 이후 국내에서 발급된 최초의 박사학위라는 설도 유력하다. 문과대학은 1952년 문리과대학으로 개편됐다가 1963년 다시 문과대학으로 분리되는 변화를 겪었지만, 현상윤이 세운 단과대 구조 자체는 지금도 모교의 뼈대로 남아 있다.


제1세대 서양철학 교수였던 이종우(모교 5대 총장), 국문학자 홍일식(국문55, 모교 13대 총장), 역사학자 김정배(사학60, 모교 14대 총장)가 각각 문대 출신 총장 계보를 이었다. 



고대 정신을 민족문화로, 조 지 훈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1968)은 1947년 문과대 교수로 부임해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펴내며 한국 서정시의 새 흐름을 열었다.


1957년 고전국역위원회로 출발한 민족문화연구소(현 민족문화연구원) 초대 소장을 맡았다.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 모교의 교가는 아름답고 웅장하다. 특히, 후렴구에 나오는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마음의 고향’은 고대인의 가슴에 영원한 모교애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또 4·18기념탑 비문과 호상비문도 작성했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로 시작하는 4·18기념탑 비문과 “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꿈을 가꾸어 온 민족의 보람찬 대학이 있어”로 시작하는 호상비문은 고대정신을 압축적으로 표상한다. 특히 호상비문은 2000년대 이후 ‘민족의 아리아’ 라는 제목의 응원곡으로 만들어져 모교를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조지훈은 고대극회, 고대신문, 고대문학회를 지도하며 모교의 학생문화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지훈 이후의 ‘문과대 문인 계보’로는 홍성원(영문56)·김훈(영문66)·유시춘(국문68) 등 소설가와 최승자(독문71)·문태준(국문89) 등 시인, 고미숙(독문78) 고전평론가, 이장욱(노문87) 소설가 겸 시인이 있다.


방송·예술 분야에서도 한국 최초의 TV 프로듀서 최창봉(영문48)을 비롯해 안평선(사학57)·심현우(사학68)·유길촌(국문58)·김승수(독문67)·김우광(독문69) 등 TV 연출가, 김경옥(영문48)·고금석(독문70) 등 연극 연출가, 조성현(국문61)·김수현(국문61)·이금림(국문66) 등 극작가, 여운계(국문58)·손숙(사학63)·장두이(국문70)·예수정(독문73)·황건(노문98) 등 여러 문대 출신 배우가 배출됐다.


조지훈 선생의〈승무〉친필 원고 ©고려대학교박물관



 


영원한 총장·마지막 광복군, 김 준 엽


동양사학자이자 광복군 출신인 김준엽(1923~2011)은 게이오대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1949년 문과대 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36년간 재직하며 아세아문제연구소(현 아세아문제연구원) 설립을 주도하고 중어중문학과·노어노문학과 신설을 이끌었다.


1982~1985년 제9대 총장으로서 신군부의 압력에 맞서 제적 학생 복학을 추진하다 총장직에서 물러났고, 학생들의 전대미문의 복귀 시위 속에서 ‘영원한 총장’, ‘마지막 광복군’으로 기억됐다.


그가 1957년에 세운 아세아문제연구원은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설립된 아시아 지역 연구 기관 중 하나이자 대학부설 종합연구소의 선구적 사례다. 특히 북한 연구와 동북아 국제관계 연구에서 오랜 축적을 갖고 있다. 1962년 이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산권 연구도 시도했다.


이는 국교 수립 이전에 중어중문·노어노문학과의 문을 열게 한 동력이었다. 지금도 동아시아·중국 연구의 거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후 수많은 교우들이 외교와 국제기구, 통상 무대로 진출하는 통로가 됐고, 아세아문제연구원을 통해 정경대와의 융합 연구 기반도 마련됐다.


총장으로서 지조 높은 고대인의 표상으로 남은 그는 퇴임 후에도 중국 대학 내 한국학 연구소들을 후원하며 오늘날까지 한중 인문 교류의 물밑 인프라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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