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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교우 모임 베트남 호치민 교우회현지인 교우부터 귀임자 교우까지1992년부터 베트남 남부의 중심 교우회로1992년에 조직된 호치민교우회는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한국-베트남 수교 이후 한국 기업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진출하면서 자연스럽게 교우회가 형성됐다. 저렴한 인건비와 유리한 투자 환경 등을 이유로 여러 기업이 지사와 현지 법인을 개설했다. 우리 교우들 또한 베트남 남부 지역의 경제 중심지인 호치민시에서 기업 주재원, 법무법인, 금융계, 건설, 제조, 서비스업, 공공기관 등 베트남 사회 전반에 다방면으로 활약하고 있다. 호치민 교우들은 베트남 사회와 경제 전반에 걸쳐 다방면에 포진해 양국의 우호를 다지고, 베트남에서 고대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현지 교우도 귀임 교우도 함께‘다양성 속의 결속력’은 호치민교우회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다. 우선 학번의 다양성이 눈에 띈다. 6, 70년대 학번 최고참 교우들과 전임 회장들이 앞장서 호치민교우회의 전통과 정신을 잇고 있다. 또한 국적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성이 돋보인다. 호치민 교우회는 현지인 교우회를 산하에 두고 한국인 교우회와 상호작용하고 있다. 20여 명의 교우들로 이뤄진 베트남인 호치민교우회는 별도의 자율성을 가진 조직으로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으며, 매년 송년회와 정기모임을 통해 한국인 교우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호치민교우회에는 국가적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고 모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활동 지역에 구애받지 않는 조직 형태가 다양성을 더한다. 적호회는 호치민에 거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간 교우들의 모임이다. 적호회는 매년 안암동에서 베트남인 유학생들과 함께 송년회를 갖고 있다.인력 부족과 귀임 교우를 위한 대책국적, 나아가 활동 지역까지 뛰어넘어 내실이 탄탄한 활동을 펼치는 호치민교우회이지만, 해외 교우회 특성상 여전히 인력 부족의 문제는 아쉬움과 극복할 과제로 남아있다. 교우들의 삶의 터전이 국경을 넘어 형성되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여러 환경적 요인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모국에서 호치민으로 들어와 삶을 시작하는 교우들이 있는 만큼, 호치민교우회에서 얻은 소중한 인연을 뒤로 하고 모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교우들도 존재한다. 적호회와 같은 귀임 교우들의 모임이 따로 존재하지만, 소모임 등 활동을 주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호치민교우회는 모교에서 정기적으로 호치민 파견 교우의 정보를 제공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호치민교우회는 교우회 행사 시 모교로부터 응원 영상과 기념품 지원 등이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라 전했다.소모임을 통한 다양성과 단합다양성은 호치민 교우회의 활동 내용에서도 두드러진다. 호치민교우회는 골프 뿐만 아니라, 테니스, 당구, 탁구, 농구 등 여러 스포츠 소모임을 조직해 지속적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교우들은 소모임을 통해 매주 1~2회씩 모여 친목을 다진다.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되는 이들 소모임은 호치민교우회를 넘어 모교 교우사회의 큰 자랑거리다.호치민교우회는 베트남 남부에서 고대정신을 대표하는 단체이자 국적과 혈연을 초월한 교우 정체성을 제공하는 조직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2월 신년회부터, 5월 회장배 골프대회, 9월 말 정기 고연전, 11월 가족 동반 체육대회, 연말 송년회까지 다양한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 된 모습을 보이는 호치민교우회는 단합, 화목, 애정, 관심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기며 또 다른 도약을 준비 중이다.정윤석 기자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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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사공정숙 모교 사범대 명예교수 사공정숙(수학53) 사범대학 명예교수는 모교 수학과 1회 입학생이다. 경기여고 1학년 시절 6.25전쟁이 일어나 아버지의 고향인 군위군 효령면으로 피난을 갔다. 대구 효성여고로 전학했다. “졸업할 무렵 마침 그때 고맙게도 고대가 대구에 있었어요. 여학교를 다닐 땐 글도 쓰고 하면서 문과쪽 소질이 있었어요.”교육자였던 아버지가 “앞으로 과학시대가 오니 모든 과학의 기초인 수학을 공부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1953년은 고려대 자연과학 분야 학문이 시작된 해다. 모교는 문과대학을 문리과대학으로 개편해 수물학과, 화학과, 생물학과를 신설하고 별도로 농림대학을 설립했다. 이듬해 수물학과가 수학과와 물리학과로 분리될 때 수학과로 진학했다.입학 첫해 특대생으로 주목받아입학하던 해부터 우수한 성적으로 특대생에 뽑혔다. 고대신문은 1953년 12월 15일자 1면 ‘동양의 큐-리가 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문리대 수물과의 사공정숙양(19)은 전학기에 있어서 평균성적 88점을 취득하여 전고대에서 많은 남성들을 물리치고 당당 최고득점자의 영예를 획득하였다. 아마 반세기에 가까운 고대 역사상 여자학생이 수위성적을 차지한 예는 없었던 것 같다.”그해엔 여학생 입학자가 늘어나 처음으로 여학생환영회가 열렸다. 이에 대해선 본 연재 제6회 최찬희(법학51) 교우 이야기(2022년 6월호)에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사공정숙 교수는 재학시절 유진오 총장을 비롯해 많은 교수의 사랑을 받았다고 기억한다. “교무처장이었던 사학과 김성식 선생님은 특별히 더 저를 예뻐해 주셨어요. 졸업 후에도 선생님 댁에 자주 다녔습니다.”수학과 교수 거쳐 수학교육과 창설초창기 모교 수학과에는 한필하, 김치영, 박태삼 교수 등이 있었다. 사공정숙 교수는 1957년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해 김치영 교수 지도로 석사학위를 마쳤다. 당시에는 새로운 분야였던 위상수학을 전공했다. 김치영 교수가 1960년 연세대로 옮긴 뒤에도 찾아가 세미나를 하곤 했다.“학부 졸업 무렵 교육학과(당시엔 철학과) 왕학수 선생님이 저를 수도여고에 데려가 교생실습을 시켰어요. 그때부터 교사로 생활하며 공부를 계속했어요.”몇 년간 강사 생활을 거쳐 1969년 이공대학 이학부 수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사공 교수는 과거에 쓴 글에서는 교수 임용까지 여자라서 겪었던 어려움을 기록했는데, 이번 인터뷰에서는 “다 좋았어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여자가 수학과 교수로 온다니까 눈여겨보긴 했어요. 하지만 선생님들도 예뻐해주고 학생들도 잘 따라주었어요.”1977년 당시 정한숙(국문46) 사범대학장의 요청으로 수학교육과를 신설하며 자리를 옮겼다. 혼자서 수교과 창설 작업을 했다. 1979년 심재웅 교수, 1980년 우무하 교수가 부임했다. 수교과 학생들이 졸업 후 취업이 잘돼 기뻤다고 한다.사범대학장·교육대학원장 역임모교는 1958년 여학생 수가 200명을 넘어서자 여학생회관을 짓고 초대 여학생감으로 전순득 교수를 임명했다. 사공정숙 교수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 모교 여학생감을 맡았다.“전순득 교수님은 제가 잘 모르는 분이에요. 가정과 이태현 선생님, 불문과 정숙정 선생님에 이어 제가 여학생감을 맡았어요.”1975년부터 1979년까지 여자교우회장을 지냈다. 장학금 조성에 힘써 한 학기 2명씩 주던 것을 3명씩으로 늘렸다. 1991년 2월 26일 사범대학장에 임명됐다. 고대 최초의 여자 학장이자 교무위원이었다. 그해 7월에 발간된 여성 월간지 ‘라벨르’는 고려대 첫 여학장인 사공정숙 교수에게 자녀 교육법을 묻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1998년 7월에는 교육대학원장에 임명돼 2000년 1월까지 재직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2월 29일 정년퇴직했다.“교육대학원에 대한 평가가 있던 시기였는데 일대 혁신을 하여 좋은 성과를 거뒀어요. 보통은 정년 앞두고 편하게 지낼 수도 있는데, 저는 마지막까지 고려대에 충성을 다했어요.”사공정숙 교수는 사공인숙(수학55) 교우를 비롯해 동생 3명, 자녀 2남 2녀가 모두 교우이다. 사위 오세훈(법학79) 교우는 현재 서울시장, 아들 송상기(서문86) 교수는 모교 국제처장이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본보 편집위원도 지냈다. 카톨릭교수회 부회장을 지낸 사공정숙 교수의 성북동 자택에는 남편이었던 송영수 조각가(1970년 별세)의 ‘십자고상’ ‘기도(신부)’ 등의 작품이 곳곳에 놓여 있다.전용호(국문86) 모교 박물관 특임교수
202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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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를 기록하다> [25] 모교 영자신문 창간멤버민재식 교우의 1950년대 이야기 “중앙도서관 석탑의 우람한 모습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었다. 민재식이 중심이 되어 발행했던 학생 동인지의 이름도 《석탑문학》, 내가 주동이 되어 펴냈던 영자신문의 제호도 민재식의 제안으로 즉 ‘석탑’이라고 했다.”민영빈(영문51) 교우 회고록 《영어강국 KOREA를 키운 3‧8따라지》(2004)에 나오는 내용이다. 민영빈 교우는 1954년 창간한 모교 영자신문 의 초대 편집장이었다. 2018년 작고한 민영빈 교우와 같은 과 동기인 민재식(영문51) 교우는 영자신문 창간부터 시사영어사(현 YBM) 경영까지 평생을 함께했다. 피난시절 동인지 《석탑문학》 펴내“민영빈이는 황해도 해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6·25때 월남했고, 나는 전라도 화순군 이양면이 고향이에요. 김일성대학을 다니다 월남한 신일철(철학51)하고 민영빈이 친해졌고, 나하고도 친해져 셋이 평생 친구가 됐지요.”모교 철학과 교수로 도서관장, 문과대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한 신일철 교우는 2006년 작고했다. 민재식 교우는 광주사범학교를 나와 이양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51년 고려대에 입학해 광주의 전시연합대학인 조선대를 1년 다녔다. 1952년 교직을 그만두고 대구에서 하숙하며 원대동 임시교사에서 공부했다. 후배 이석선(법학52) 교우를 비롯해 몇 사람이 함께 하숙했다. 광주사범학교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던 민 교우는 1952년 석탑문학 동인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지훈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국문과 조지훈, 영문과 이호근, 교육학과(당시엔 철학과) 왕학수 교수 세 분이 단짝이었어요. 강의를 마치면 날마다 감나무집이라는 막걸리집에 가시는데 조지훈 선생이 따라오라고 해서 몇 번 갔어요. 마당에 평상이 있는 술집이었어요. 한 번은 아침에 깨어보니 이호근 선생 침대 밑이었던 적도 있었어요.”1953년 7월 《석탑문학》이라는 동인지를 발간했다. 여기에 민재식 교우는 훗날 등단작이 되는 <속죄양>을 비롯해 시 2편을 발표했다. 동인 7명의 시 20편이 수록된 《석탑문학》은 고대 최초의 문학 동인지이다. ① 모교 영자신문은 1954년 창간했다가 중단된 후 1968년 라는 이름으로 복간했다. 사진은 라는 원래 제호로 다시 발간하기 시작한 1969년 3월 1일자 영자신문. ② 1953년 7월 대구 피난시절 나온 《석탑문학》 ③ 1953년 7월 8일 열린 《석탑문학》 출판기념회. 앞줄 가운데가 조지훈 교수, 맨오른쪽이 민재식 교우.70년 전 창간 1953년 휴전이 됐지만 본교가 안암동 교사로 돌아온 건 1954년 2월이다.“처음 학교에 와서 봤는데 기가 막히게 멋진 건물이었어요. 말로 듣고 사진으로 본 적도 있지만 실제로 보니까 너무 멋있어 내가 석탑에 매료된 거야. 지금도 학교 생각하면 석탑 건물이 떠올라요. 그래서 민영빈하고 만든 영자신문 이름을 ‘The Granite Tower’로 했을 거예요.”민영빈 교우는 회고록에서 1954년 7월 이화여대 영자신문 를 보고 영자신문 창간호를 만들었으며, 맨 앞에 인용했듯이 제호 는 민재식 교우가 제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제2호는 1954년 10월 15일자로 발행했다. 이후 월간으로 몇 번 더 발행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영자신문은 실물로 남은 게 없다.“타이프라이터로 만든 신문을 민영빈하고 둘이서 유진오 총장님한테 갖고 갔던 기억은 분명해요. 그런데 그때 내가 어떤 기사를 썼는지, 몇 번 더 냈는지는 모르겠어요.”모교 영자신문은 발행이 중단됐다가 1968년 9월 복간했다. 라는 제호로 네 번 낸 후 1969년 3월부터 원래 이름인 로 현재까지 발행하고 있다. 는 올해 창간 70주년이다.시인이자 T.S.엘리엇 연구자민 교우는 1955년 졸업 후 외자청(현 조달청)에 취직했다. 국제경쟁입찰을 통해 생필품을 수입하는 업무였다. 1956년 《문학예술》 3회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1960년 첫 시집 《속죄양》을 사상계사에서 출간했다. 같은 날 시집을 낸 박희진(영문50) 교우와 함께 합동출판회를 열었다. 민 교우의 시는 1950년대 한국 모더니즘 작품으로 연구되며, 영문과 김종길(영문46)‧김우창 교수 등의 번역으로 해외에 소개됐다.민 교우는 고대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해 1958년 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어로 작성한 이 논문은 T.S.엘리엇에 관한 국내 최초의 학위논문이다. 1961년 외자청을 나와 민영빈 교우가 운영하는 시사영어사에 들어갔다. 이후 1991년까지 30년 동안 일하며 편집장, 부사장, 사장을 역임했다. 민 교우는 시사영어사가 발간한 영어교육 도서와 잡지의 실무 책임자였다. 특히 그는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 공저 및 단독 집필자로서 다섯 차례 문교부 검정에 합격했다. 은퇴 후 민 교우는 새로 쓴 시와 T.S.엘리엇의 번역시를 책으로 묶어내고 있다. 민 교우는 요즘 자신이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시를 짓고 있다.“제목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인데 아직 완성하진 못했어요. 내 마지막 작품이겠지요.”전용호(국문86) 모교 박물관 특임교수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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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지난 1월 김동원 모교총장이 하노이교우회를 방문했을 당시 크림슨보이스와 공연하는 모습. (아래 왼쪽) 지난해 하노이 고연전에서 응원단과 교우들. ③ 하노이한인국제학교 졸업 후 모교에 입학한 23학번 학생들에게 입학축하금을 전달했다. <해외교우 모임> 하노이교우회 다채로운 소모임 운영으로 교우회 활성화 도모타지에서 후배사랑 이어가며 교우 네트워킹 힘쓸 것비행기로 4시간이 걸리고, 시차는 2시간 느린 하노이. 워낙 잘 뭉치기로 유명한 고대인답게, 베트남의 심장이라 불리는 그곳에서도 교우들이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지난 1994년에 창립한 하노이교우회(회장 배용근·법학92)는, 지난해 제16대 회장으로 취임한 배용근 교우를 필두로 단단한 결속력과 다채로운 활동을 자랑하고 있어 현지 한인사회에서 부러움을 사고 있다.모교 인연 하노이서도 이어간다여느 교우회와 마찬가지로 하노이교우회에서도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운영하는데, 168명이 모인 채팅방에는 현지에 거주하는 교우들은 물론 한국으로 귀임한 교우들도 참여해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접 국가인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지로 이주한 교우들, 또는 모교로 유학을 다녀온 베트남인 교우들까지 하노이교우회에 소속되어 활동 중이다.해외 교우회 특성상 대부분의 교우들은 공관 영사부터 시작해 공사 소속 공무원, 한국 기업 파견 법인장, 주재원, 현지 사업가, 자영업자, 교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민의 역사가 길지 않은 탓에 소속된 인원 역시 다른 교우회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적은 편임에도 많은 교우들이 재정을 후원하거나 재능을 기부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교우회를 지원하고 있다.각양각색 모임으로 더 끈끈하게하노이교우회는 다양한 색깔을 지닌 소모임들이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난해 봄에 창단한 밴드 '크림슨보이스'는 하노이교우회에서 주관하는 행사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면서 교우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 밖에도 ‘하노이고대골프단’은 정기 골프모임과 하노이 고연전 골프대회를 지원하면서 교우들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있다.성별과 연령대별 모임도 활성화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여자 교우들이 모인 여교우회 ‘PT(Pink Tigers)’는 일명 ‘Pretty Tigers’로 불리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80년대 학번까지의 교우들로 구성된 ‘GT(Golden Tigers)’, 그리고 90학번 이후 교우들의 모임인 ‘CT(Crimson Tigers)’ 역시 수시로 모여 단결력을 보여준다.한국으로 돌아간다 해서 교우들과의 인연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노이교우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다가 서울로 복귀한 교우들도 '하고서(하노이고대서울)'라는 모임을 조직해 타국에서의 인연을 지속하고 있으며, 현지 고등학교에서 모교로 진학한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돌아와 활동하기도 한다. 특히 하노이교우회는 전 세계 한인국제학교 중 학생 수가 가장 많은 하노이한인국제학교에 매년 방문해 졸업 후 모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축하금을 후원하고 있다.교우들의 든든한 버팀목 되길하노이교우회는 더 많은 교우들이 하노이교우회에 합류할 수 있도록 홍보 채널을 다각화하고, 고대교우회 및 모교와 함께 지역교우회의 활성화를 도모할 계획이다. 지난해 하노이 고연전에서는 크림슨보이스가 모교 응원단과 함께 응원전을 펼친 바 있으며, 또한 승명호 교우회장과 모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들이 지난해 하노이교우회를 찾았다. 올1월 김동원 모교총장이 동남아 순방 중 하노이교우회를 방문한 데 이어, 모교에서 교수진 및 학생들의 방문이 연달아 예정되어 있어 모교와의 연계를 강화할 계획이다. 내달 9일에는 하노이 고연전 연승을 위해 교우들의 화합과 실력을 다지는 차원에서 ‘제1회 재하노이고대교우회장배 골프대회’를 개최한다. 하늘빛 기자
20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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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31일에 열린 공과대학 설립 60주년 기념 캠퍼스 미래 포럼에 참여한 교우들과 재학생들. 고대미래포럼 “학과와 학번을 넘어서미래를 탐구하고 준비한다”고대미래포럼(회장 강전찬·법학81)은 ‘미래를 탐구하고 미래를 준비한다’는 슬로건 아래 학과와 학번을 넘어선 교우 네트워크를 표방하는 모임이다. 교우들의 전문지식을 홍보하고 연결하여 전문가 및 교우들 간의 교류를 강화하고자 2017년에 설립됐다. 초기에는 디너토크 형태로 연사 초청 강연 및 발제를 진행했고, 이후 친목 도모를 넘어 교우들의 역량을 규합하는 데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지식 공유와 의견 교류, 미래 전망 및 전략 수립, 네트워킹 기회 제공, 사회경제적 이슈에 관한 논의의 네 가지 취지를 담아 포럼을 개최해왔다. 2024년 현재 회원 수 369명에 활동 정회원 수 153명으로 성장했고, 포럼 참석회원 중 90·00년대 학번이 전체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2024년 제1회 정기포럼 열려그간 비정기적으로 개최되던 고대미래포럼은 2023년을 기점으로 분기별 정기포럼과 디너토크 형태로 진행되고 지난해 10월 31일에는 ‘졸업생과 재학생이 함께하는 창업 EXPO 캠퍼스 미래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격월로 홀수월 세번째(휴일인 경우 네번째) 수요일 저녁마다 산업별 특집형태로 개최되며 11월은 캠퍼스 미래포럼으로 재학생과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지난달 17일 제1회 정기포럼 ‘과학기술의 미래를 논하다’가 60여 명의 교우가 참석한 가운데 모교 신공학관에서 열렸다.첫 번째 강연 ‘지속 가능한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인적, 물적 선결과제’에서 이해근(재료공83) 공과대학장은 ‘지속 가능한 자연계 학과 발전’을 강조하며 “대화형 토론과 혁신적인 솔루션을 통해 재정적 제약을 극복하고 교육의 질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어진 강연 ‘Why, 기술창업인가?’를 발제한 장재수(전자공81) 고대기술지주 대표는 창업활성화를 통한 기대사항으로 신성장 동력 확보, 일자리 창출, 중소기업 육성, 지역 균형 발전을 강조했다. 현재 국내의 신규 창업 기업 수와 기업 가치가 1조원이 넘는 유니콘 기업의 사례를 분석하며 “연구자들의 기술 기반 창업이 국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년 10월 31일에 열린 공과대학 설립 60주년 기념 캠퍼스 미래 포럼에 참여한 교우들과 재학생들. 참석자들 성원 이끌어내이날 행사가 끝난 후 교우들은 소그룹으로 나눠앉아 간단한 다과와 함께 네트워킹을 이어갔다. 박근영(건사환19) 재학생은 “예전 블록체인 학회에서 선배님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선후배간 도움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모임에서 기회를 얻게 되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주대선(행정03) 교우는 “고대미래포럼에서 교우들을 잇는 채널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회 공헌 활동도 계획하고 있어고대미래포럼은 교우 커뮤니티를 강화해 맞춤형 프로파일 및 매칭 서비스를 제공하고 네트워킹으로 협업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관련 내용이 담긴 뉴스레터를 발간 중이다. 향후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전환해 교육, 출판, 세미나, 컨설팅, 연구용역 등을 통해 교우들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교우 공동체 및 사회발전에 기여할 계획이다. 나아가 올해 11월에는 재학생들을 위해 창업 및 취업박람회 형태의 캠퍼스 미래포럼을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고대미래포럼에 참여하고자 하는 교우는 홈페이지(www.kuff.kr)또는 네이버 밴드를 통해 회원으로 가입하면 된다. 정윤석 기자
202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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