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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에 스민 노래의 얼 40년 … 시대를 노래하고 청춘을 증언하다특집 - 교우·재학생 6인이 말하는 노래얼 40년 역사와 현재

등록일 : 2020-06-17 조회 : 101

학생회관 5층 노래얼 동아리실에서 만난 교우들과 재학생 대표. 맨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송혁규, 조중래, 임창준, 손성조 교우, 김효정 노래얼 부회장, 장정현 노래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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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민주동우회 추모제에서 노래얼 선후배 첫 합동공연이 있었다. 김영남 교우(오른쪽)는 1988년 통일노래한마당에서 ‘진혼곡’으로 대상을 받아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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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년 기념공연 총무 임창준 교우가 수집한 자료들. 노래얼이 1980년대에 제작한 노래집 네 권(위), 노래얼 10년사·기념공연 팸플릿과 1986년 고연문화제 팸플릿(아래).

 

모교 재학생 노래 동아리 노래얼이 올해 창단 40주년이 됐다. 노래얼 출신 교우와 재학생들은 4.18의거 6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40주년 기념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노래얼 40주년 공연은 연기됐다.지난해 4월부터 준비해온 이들로서는 아쉬웠지만 올해 중에 40주년 기념무대에 설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노래얼 출신의 조중래(영문82), 손성조(손병구, 국교85), 임창준(경영88), 송혁규(체교91) 교우 4명과 현재 노래얼 회장을 맡고 있는 장정현(경제19), 부회장 김효정(바이오시스템19) 학생 등 6명을 만나 노래얼 40년 역사에 대해 들었다.

 

1980년 석화회로 출발, 1984년에 노래얼로

“노래얼은 1980년 석화회(石花會)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어요.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 관심을 가진 선배들이 노래 동아리를 만든 거죠. 그런데 1980년대 대학가는 시대 상황에 대응하는 민중가요가 쏟아지고 그 영향으로 동아리 이름을 1984년 노래얼로 개명을 합니다. 노래얼은 80년대와 90년대까지는 민중가요 동아리 성격을 갖지만 그 이후에는 또 나름대로 시대상을 반영하는 노래와 밴드 공연을 해왔습니다. 다소 거창하게 말하자면 노래얼 40년은 한국 대학생 문화 40년의 변화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손성조)

기록을 보면 석화회는 1980년 11월 학교 동아리로 등록한다. 그해 11월 열린 제4회 대학가요제에 김재태(불문78) 작사, 김성현(원예76) 작곡의 ‘바람개비 인생’이란 노래가 입상을, 이듬해 강변가요제에서 김구영(경제81) 작사 김성현 작곡의 푸른 여름에는(맑은 오월에는)’이란 노래가 금상을 수상했다. 김성현 교우를 중심으로 석화회가 창립했다.

1990년 나온 《노래얼 10년사》에는 1980년부터 연도별 회고가 수록됐는데, 80년도의 필자는 “돌(石)처럼 굳은 마음을 꽃(花)처럼 부드럽게 만들자”라는 의미로 석화회라는 써클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예술적 풍토가 빈약해 다소 삭막했던 안암의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취지로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석화회는 이듬해 5월 제1회 석탑가요제와 싱어롱 행사를 열었다. 운동적 경향과는 관계없이 탄생했다고 하지만 1년 반이 지나 1982년 6월에 나온 노래집《 석화회 1집》에는 회원 창작곡과 함께 김민기의 노래를 비롯해 민요, 노동요 등 민중가요가 다수 수록되어 있다.

“1982년 석화회는 학생회관 207호를 사용했어요. 그 방을 석화회 혼자 쓴 게 아니라 방 하나를 반을 잘라 국교과 출신들이 만든 글말문학회하고 같이 사용했어요. 거기는 책을 보고 시를 쓰는 동아리인데 우리는 기타 치고 노래를 불러야 하니까 걔네들로선 우리가 소음이었고, 우리도 걔네들 때문에 맘껏 노래도 못하니까 자꾸 복도로 나와서 노래하고, 그것도 안되니까 민주광장에 나와서 노래 부를 때가 많았어요.”(조중래)

81학번 20여 명, 82학번 3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83학번이 들어오면서 대학가요제에 매몰되지 말자는 요구가 높아졌고, 84년에 노래얼로 이름을 바꿨다. 써클 이름 후보 몇 개 중 한글로 이름을 짓자는데에 뜻이 모였다고 한다. 그 무렵 총학생회와 함께 대동제와 고연문화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86년엔 학생회관 5층에독립된 공간도 만들어졌다. 회원수는 더 늘어나 87학번은 100명 정도였고 88학번은 120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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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아이유나 싸이 공연 분위기였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이들은 노래얼을 기억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죠. 노래얼은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식과 함께 새로운 노래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대강당 6-101에서 공연을 했는데 엄청난 학생들이 몰려와 못 들어온 학생들은 창을 올리고 밖에서 봤어요. 공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야외공연을 기획했습니다. 민주광장에서 저녁에 공연을 했는데 낮부터 학생들이 무대 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렸어요. 쉽게 얘기하면 요즘 아이유나 싸이가 온 것 같은 분위기에서 공연을 했어요.”(손성조)

6-101에서 민주광장으로 나오면서 노래얼 공연은 더 많은 학생들과 함께하는 축제가 됐다. 대형 걸개그림이 걸리고 앰프와 조명 시설을 갖췄고, 더 넓은 공간을활용하게 됐다. 음악성이나 예술성도 높아졌지만 노래가 가진 대중적 파급력을 확인하는 기쁨이 더 컸다. 손 교우의 표현처럼 지금 아이돌 그룹의 공연 같은 분위

기가 연출됐고, 김미영(영교83), 박우전(일문84), 김옥희(가교85), 김영남(간호87) 교우는 스타급 환호를 받았다고 한다.

김영남 교우는 1988년 제1회 통일노래한마당에서 손방의(행정82) 작사 작곡의 '진혼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전국 대학생들이 참여해 민중가요 창작 대전이라고 할 수 있는 행사에서 음대나 예술대가 없는 고려대에서 대상을 차지한 사실이 다른 대학 노래패에 충격을 줬다고 한다. 노래얼이 쌓아온 음악성과 김영남 교우의 가창력이 빛을 발휘한 것이다.

“이번 40주년 공연을 준비하면서 노래얼에서 창작한 노래 리스트를 만들어 봤어요. 아까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입상곡도 있고 통일노래한마당에서 입상한 ‘진혼곡’ ‘통일의 깃발’ ‘이름 없는 전사에게’ 이런 노래들이 있어요.”(임창준)

40주년 공연팀 총무를 맡은 임창준 교우가 정리한 노래얼 창작곡은 모두 36곡이다. 임 교우는 노래얼이 제작한 노래집 4권, 10주년 15주년 기념공연 팸플릿, ‘비야 오덜마라’를 비롯한 공연 대본, 노래얼 주역들의 회고담과 좌담회 등이 수록된 10년사 등의 자료를 편집국으로 보내왔다. 1980년대 학생문화와 노래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라고 하겠다.

 

신디사이저 도입해 노래극을 만들다

“84년에 노래극이라는 걸 대학가에서 처음 시도했어요. 노래와 연극이 섞인, 뮤지컬과는 다르고 춤은 없지만 스토리텔링을 갖고 극적 요소도 넣어서 노래를 했어요. 그 첫 작품이 ‘비야 오덜마라’였는데, 공연하는 날 실제로 비가 부슬부슬 내렸던 게기억납니다. 신디사이저도 도입했는데 이처럼 노래얼이 처음 시작한 것들이 꽤 많아요.”(조중래)

시대 상황도 그러했지만 저항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가 극적 요소를 갖추고 무대에서 펼쳐질 때 관객의 호응은 굉장히 높았다고 한다. 연출팀은 공연이 끝나면 수배 대상자가 되기 일쑤였고, 학생들은 팸플릿 한 장이라도 더 받아가려고 애썼다. 공연장은 긴장감과 비장미가 흘렀고 노래얼의 노래 한 곡 한 곡이 대학생들을 의식화시키는 기능을 했다.

“석화회 1집을 보면 전통음악의 애절하고 비장한 정조를 표현한 노래도 있고 70년대 포크 음악의 저항성도 들어있어요. 노래얼은 우리나라에 뮤지컬 장르가 자리잡기 전에 음악극이라는 형식에 저항적 메시지를 담는 공연을 시도했습니다. 90년대엔 다른 대학 노래패가 콘서트 형식으로 옮겨가는데 노래얼은 꽤 오랫동안 그 형식을 유지했어요.”(송혁규)

노래얼에서 펴낸 노래집은 4권이다. 모두 198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1집과 2집은 석화회, 3집과 4집은 노래얼 시절에 만들었다. 물론 정식 출판물이 아닌 제본용 책자였지만 당시 학생운동의 영향력으로 수요가 폭발했다. 특히 노래얼 4집은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노래얼 선배가 을지로에서 기획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 전에는 손으로 쓰고 악보 그려 넣었는데 4집에선 청타기를 사용해 인쇄용 악보를 넣었어요. 게다가 당시까지의 민중가요, 운동가요를 집대성했다고 할 만큼 많은 곡을 넣었어요. 구전가요는 음악을 잘하는 친구가 악보로 채록을 해서 나름대로 구전가요 악보 표준화 작업을 했어요. 거기에 기타 코드를 넣고, 노래마다 짧게나마 설명을 달았어요. 이건 누구의 추모곡이다, 누가 행진곡으로 만든 거다 설명해 놓으니 노래마다 스토리텔링이 들어간 셈입니다.”(손성조)

당시로선 불법 불온 도서였던 노래얼 제작 노래집 4권 모두 한국 문화사 연구자에겐 좋은 사료가 될 듯하다. 노래집 2집에 실린 동학가사 ‘검결’의 악보를 비롯해 전통 구전가요가 악보로 채록되어 있고 4집에는 70년대와 80년대 민중가요들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한 곡 한 곡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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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가요에서 밴드 음악으로

1990년대 말까지 노래얼은 민중가요 노래패의 성격이 강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시대 변화에 따라 인디 밴드, 인디 뮤직 동아리의 성격으로 탈바꿈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전 노래얼의 형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더군요. 그런데 어차피 시대 전체적인 흐름이 바뀌고 관객이 전혀 같이 놀 수 없는데 계속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노래는 지금 학생들의 선택이니까 시대에 맞게 밴드 형태로 바뀌었다고 해야겠지요.”(임창준)

노래얼 회원으로 들어오는 학생 수는 지금도 해마다 100여 명이 넘는다. 다만 한 학기를 지난 후 ‘주자시험’이라는 것을 보는데 남는 학생수는 기수별로 30여 명이라고 한다. 시험 내용은 민중가요나 노래패 성격에 대한 질문을 하고 앰프 다루는 방법도 확인한다고.

“1년에 두 번 정기공연을 합니다. 여름방학에 한 번, 2학기 중간고사 끝나고 가을공연을 한 번 합니다. 방학에 원하는 학생들이 비정기 공연을 하고, 신입생 환영 공연이나 대동제 프로그램 중 하나로 공연을 하기도 합니다.”(장정현)

신입생 환영 공연은 야외에서 하고 그 외에는 대부분 실내공연이다. 민중가요도 부르지만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부른다.

“인디 밴드 노래도 하고 록밴드, 팝 음악도 합니다. 아이유나 자우림의 노래도 하고. 공연도 신촌이나 홍대 앞 라이브 공연장에서 하거나 학생회관 6층 공연장에서 하고 있어요.”(김효정)

 

40주년 맞아 선후배 합동공연 준비

“2018년 민주동우회 추모제에서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오른 적이 있어요. 선배들이 만든 무대하고 후배들이 만든 무대를 진행한 거죠. 40주년이라고 후배들에게 중압감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선배는 자신의 레퍼토리가, 후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이 있을 테니 그걸 잘 섞으려고 합니다. 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 하는 거라 부담감은 없어요.”(송혁규)

40주년 기념공연은 크게 3부로 구성된다. 1부는 ‘그때 그 현장의 노래’로 80년대와 90년대의 노래, 2부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로 졸업생과 재학생 화합의 무대, 3부는 ‘노래로 하나되는 우리’로 관객과 함께 부르는 노래이다.

“노래얼 40주년인데, 앞쪽 20년과 뒤쪽 20년이 대비가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번 합동공연에서 그 대비되는 20년을 결합해보고자 합니다. 합창도 같이 하고 중창과 독창도 재학생이나 2010년대 학번에게 배분해서 다함께 어울려보고 싶습니다.”(임창준)

코로나19로 중단됐지만 공연팀은 약 50명 규모라고 한다. 2018년 민주동우회 추모제 이후 40주년 기념공연에 선후배가 함께 무대에 오르자는 제안이 나왔고 지난해 4월경부터 공연을 기획하고 준비해왔다. 40주년 기념공연 제목은 ‘시대를 노래하라 청춘을 증언하라’이다. 40년 동안 이들은 시대를 노래했고, 청춘을 증언해왔다. 올 가을, 이들의 무대에서 시대의 노래, 청춘의 증언을 들을 수 있길 기대한다.

 

노래가 고맙고 노래얼이 고맙고

마지막으로 노래얼 40주년을 맞는 소감 그리고 노래얼이 자신의 삶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물었다.

 “80년대에 입학해 90년대에 졸업할 때까지 노래얼을 삶의 전부인 양 생각했어요. 40주년 준비로 19학번 후배들을 만나면서 내가 졸업한 후 20년과 그 이전 20년을 잘 연결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야 후배들이 또 50주년을 준비하겠지요.”(임창준)

 “80년대는 척박한 시절이었지만 노래얼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친구와 선후배를 만난 인연도 고맙고, 노래라는 일상의 문화예술이 매개가 된 것도 좋았습니다. 우리 활동이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고 대학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이렇게 함께하는 것은 노래가 가진 힘 때문이라고 해야겠지요.”(손성조)

 “저는 노래얼 때문에 전공을 바꾼 사람입니다. 체교과를 나왔는데, 노래얼에서 기타 배운 인연으로 졸업 후 20년 넘게 음악과 공연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옛날 추억도 떠올리고, 새롭게 후배도 만나고, 공연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게 제겐 무척 큰 기쁨입니다.”(송혁규)

 “학교 다니면서 두세 학번 선배도 만나기가 어려운데 이번 40주년 준비하면서 노래얼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선배님들과 교류할 수 있어 좋습니다. 같이 공연 준비하면서 더 큰 자부심과 소속감을 갖게 됐습니다.”(장정현)

 “이번에 노래얼이 언제 생겼고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노래얼이 40년이나 유지된다는 게 놀랍고 뿌듯한 느낌입니다.”(김효정)

 “지금도 석화회와 노래얼 사람들 만나는 게 제일 좋고 후배들이 남아서 노래얼 활동 계속 해주는 것도 고맙습니다. 40주년 기념공연을 언제 갖게 될지 모르지만 80년대 학번 교우들이 많이 와주면 좋겠습니다.”(조중래)

전용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