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함께하는 고대교우회

Home > 교우회보 > 특집

특집

행동성이 결여된 지식인을 거부하고 반항의 봉화를 들다되새겨본 4·18의거 전개과정

등록일 : 2020-04-13 조회 : 259

경찰 봉쇄선을 돌파하는 시위대 뒤쪽에 동대문이 보인다. 아래사진은 ‘4·19 혁명 참여 고려대학생 부상자 명단’. 부상 상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등록이 유력하다.

첨부이미지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 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 고……”. 1960년 4월 18일. 3000 여 명의 모교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섰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용기있는 결단이 4·19를 가능하게 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뜨거웠던 그들의 외침을 되새겨 본다.

 
1960년 4월 2일. 고대신보(현 고대신문)에 사설이 게재됐다. 당시 고대신보 편집국장이었던 박찬세(법학55) 교우가 모교 신입생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예리한 관찰에 의하여 얻어진 지혜로써 과감하게 행동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라.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인 지식인을 거부한다.”라고 끝맺는 사설은 신입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고대인들의 야성에 불을 댕겼다. 교정 곳곳에 봉기를 촉구하는 벽보가 붙었고 4월 11일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재학생들 사이에는 ‘민족 고대’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없다는 분위기가 번져나갔다.


신입생환영회를 D데이로 거사 준비

모교 5개 단과대학 학생위원장단은 의논 끝에 행동의 날을 4월 16일 전체 신입생 환영회날로 결정했다. 신입생 환영회는 합법적으로 여러 인원이 모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학생위원장단의 판단에 따라 거사일은 4월 18일로 연기됐다. 그 무렵 학생처장이었던 현승종 교수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때는 마침 신학기 초의 일이라 신입생 환영회를 연례에 따라 하기로 되어 있어……, ‘고대’ 라는 마크가 들어간 타월을 마련하였으며 또 환영회에 필요한 많은 현금이 지출되었다. 결국 그돈이 고대생들이 4·18을 계획하고 수행한 자금이 되었으며, 그 타월이 모든 학생의 머리에 동여져 국회의사당 앞까지 고대생임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준 표지였다.”

 

본관 앞 선언문 낭독 후 거리로

4월 18일 오전 11시부터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본관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교정 곳곳에는 12시 50분까지 본관 앞으로 집합할 것을 알리는 종이가 펼쳐지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궐기를 독려하는 마이크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오후 1시경 3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본관 앞 현관에서 정경대 학생위원장이었던 이세기 (정외57) 교우가 고대신보 편집국장 박찬세 교우가 작성한 ‘4·18 선언문’을 낭독했다. 낭독이 끝남과 함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체육부 학생들을 앞세워 국회의사당(현 서울특별시 의회 자리)을 향해 출발했다. 안암동 로터리, 신설동 로터리, 종로 등지에서 경찰의 저지선과 충돌했다. 많은 학생들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됐으나 시위대는 저지선을 돌파하거나 우회해 오후 2시 30분경 500여 명의 학생들이 국회 의사당 앞에 모였다.

 

첨부이미지 

 

“죽여라!”, “깡패다!”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고대생들은 연좌농성을 하며 “학원의 자유를 달라!”, “기성 정치세력은 각성하라!”, “정치책임자는 마산 사건에 답변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당시 모교 유진오 총장은 2차례 연설을 통해 사회적 부정에 항거하는 고대생들의 용기를 격려하고 치안당국에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요구했다. 고대생들은 오후 6시 40분경 시경국장에게 안전한 귀가를 보장받고 경찰의 선도에 따라 모교로 향했다. 오후 7시 40분. 학교로 향하던 학생들이 천일백화점 앞을 지나가는 순간 대한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소속 깡패들이 자전거 체인, 벽돌, 야구방망이 등으로 무장하고 습격했다. 수십명의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고 이 소식이 다음날 신문에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진과 함께 보도돼 시민들을 분노케 했다. 결국 이 분노는 4·19혁명을 촉발시켰다.

 

혁명의 도화선 4·18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의 김학준 교수는 4·18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바로 고려대학교의 그 야성이 지성과 겸비하여 폭발한 것이 4·18이었다. …… 나는 이 고려대 학교야말로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의 민주혁명을 만들어낸 산실이었다는 점에서 경의를 표한다” 4·18을 계기로 학생시위의 주역이 지방의 고교생에서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뀌었으며 시위목적도 부정선거규탄에서 독재타도로 전환됐다.

모교는 4·18의거 1주년인 1961년 4월 18일 교우회와 재단 및 교직원들의 후원으로 4·18

기념탑 제막식을 열었다. 유진오 총장은 이 자리에서 “이 탑은 4·18의거를 자랑하려함이 아니요, 그 정신을 길이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건립된 것”임을 강조하고 “정의의 칼을 경솔히 빼지 말라”고 당부했다. 4·18 기념탑은 본관 오른편에 위치해 있으며 모교는 매년 4월 18일에 헌화식을 열고 그날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김선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