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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짝사랑 아닌 우리의 사랑 … 다시 태어난 고대가족
새로 문을 연 영철버거 매장을 방문한 것은 지난달 26일(화). 매장한 켠에 마련된 게시판에는 영철버거를 응원하는 메모지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수많은 메모지들이 한 목소리로 외치듯 교우와 재학생들이 영철버거를 돕기 위해 힘을 모았던 것이 지난 해 9월이다. 6개월이 지난 지난달 6일(수)영철버거는 마침내 정식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그 후로도 어느새 3주가 흘렀다. “매장이 있다는것 자체가 뭉클합니다. 설레고, 쑥스러우면서 미안하고, 참 복잡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참 고맙습니다.” 비긴 어게인, 영철버거 영철버거는 2000년 리어카 노점에서부터 시작해 가게와 체인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영업난을 이기지 못하고 16년의 장사 끝에 문을 닫았다. 그 소식에 모교 학생들은 ‘비긴어게인 영철버거’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정경대학 학생회의 주도로 시작된 이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에는 교우와 재학생 1870여 명의 손길이 보태져 6800여만 원이 모였다. 당초 목표의 3배를 웃도는 금액이다. “졸업생들이 통영, 광주 등 지방에서도 올라와 응원을 해 줬습니다. 그들이 새로 단장한 가게에와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를 확인한 느낌이었어요. 바로 ‘나만의 짝사랑이 아니었구나. 우리가 함께 사랑했구나’하는 것을 말이지요.” [2016-02-12](Hit:12821)

글로벌 헬스케어산업의 허브를 꿈꾼다
전 세계 선도국가들이 의료산업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주목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post-IT 시대에 국민 먹거리산업이 될 의료산업 활성화를 위해 오송생명과학단지 내에 오송 첨단의료복합단지(이하‘첨복단지’)를 설립했다. 그리고 2010년 12월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이 첨복단지 활성화를 위해 출범했다. 2014년 12월 선경교우가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이하‘재단’)의 제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의료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중책을 짊어진 선경 이사장 인터뷰를 진행했다. ‘죽음의 계곡’에 다리 놓는 오송단지 선경 교우는 우리 의료산업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제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건너야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의료산업의 BT(바이오기술), IT(정보기술), NT(나노기술) 등의 기술 수준은 세계적입니다. 의료진의 역량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토대를 활용한 기반연구를 통해 시제품 개발에 성공해도 실용화와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문제입니다. 즉 마지막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죽음의 계곡에 빠지고 마는 것이죠. [2015-11-12](Hit:18450)

소모임 활성화로 자발적 참여 문화 만들겠다
“고연전을 직접 참관한 건 30년만인 듯합니다. 고연전을 통한 결집력은 우리 고대인의 의식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재학생 경기이지만 졸업생들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해외에서도 양교 졸업생들이 고연전을 통해 우의와 친목을 다진다는 점에서 평생 축제문화가 된 셈입니다.” 교우회 미주지부 연합회장 안성호(기계공78) 교우는 지난달 18일(금)과 19일(토) 열린 정기고연전을 직접 참관했다. 오랜만에 귀국해 모교를 방문하고 고연전도 보고 추석 명절까지 지낼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먼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은 고향의 풍경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안성호 교우는 재학시절 고연전은 사회적 관심사였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듯 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고연전 현장에서 느낀 뜨거운 응원 열기는 모교사랑, 교우사랑의 열정을 되살려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미주연합회장으로보낸 1년 안성호 교우는 지난해 6월 27일 제4기 미주지부연합회장에 선임돼 1년여를 보냈다. 2008년 10월 30일 결성된 교우회 미주지부 연합회는 지난해 작고한 故김성철(경영58) 교우가 제1기와 2기 회장, 유재현(농경제62) 교우가 제3기 회장을 역임했다. 안 교우는 전임 회장들이 연합회의 기반을 만들었다며 자신은 지역간 협조관계를 강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2015-10-16](Hit:14305)

창의성과 자율성 갖춘 인재 양성으로 미래사회 대비해야
오늘날의 대학은 참으로 다양한 역할들을 요구 받는다. 지식인 양성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 취업준비기관으로서의 역할, 인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 전문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상충되는 요구들 속에서 균형을 잡고,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배출하는 것은 모든 대학의 숙제다. 모교는 이러한 숙제를 풀기 위한 방안중 하나로 교육부총장직을 신설했다. 교육을 강조하고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말하자면 교육부총장직은 모교에 입학할 인재 발굴과 육성, 미래 사회에 우수성을 발휘할 졸업생 배출과 재교육 등을 총괄하는 자리이다. 지난 4월 17일 모교의 초대 교육부총장에 취임한 이남호(국문75) 교우는 이러한 변화를 “대학의 본질에 더욱 충실하기 위한 변화”라고 설명했다. “최근 대학사회에서 강조되는 것이 연구입니다. 모든 평가가 연구지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류탓에 교육이 연구에 비해 약간 소홀해지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연구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교육입니다.” 미래사회는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교육방식으로는 미래 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키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교육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2015-09-21](Hit:12779)

모교에서 받은 긍지, 후배들에게 되돌려주다
지난달 1일, 편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한 교우가 모교를 찾아와 10억 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바로 유휘성 교우였다. 유 교우는 모교 졸업 후 1969년 조흥건설을 설립해 연 1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1년 평생을 일궈온 조흥건설사업과 재산을 정리하며 10억원이란 거금을 모교에 한차례 내고,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2011년 신경영관(현재 현대자동차경영관) 건립기금으로, 두번째 ‘인성기금’은 생활이 어려운 재학생들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반포지효 생활이 어려운 재학생들을 지원하게 된 동기는 자신 역시 고학했기 때문이라고. 유 교우는 6.25전쟁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형편으로 모교 재학 당시에도 주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동기 중에 송재원(상학58)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한테 매일 밥을 얻어먹고 다녔었지. 그때만해도 학비보다 밥먹는 것이 큰 과제였다”며 유 교우는 후배들이 학비 걱정 없이 학업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흑백사진과 낡은책자 유 교우는 흑백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교복 차림이었다. 복장규정이 없는 지금과는 달리 그의 재학시절에는 교복이 있었다. 유 교우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교복을 입었다고 한다. “교복이라서 입었다기보다는 가난했기 때문에 다른 옷이 없었다. 3학년 재학 때 4.18이 일어나 안암동 로터리를 순경들이 버스를 세워 막고 빠져나오려는 학생들을 곤봉으로 때렸다. 동복 교복을 입고 있기에 더운 날씨여서 옷을 풀어 헤쳐놓았는데, 버스 밑을 지나가려다 순경에 붙잡혔다. 잡히지 않으려 교복을 벗어버리고 뛰었고, 친구와 함께 국회의사당까지 갔다. 그 때 모교 법학과 교수였던 현승종 선생이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오라 했었던 기억이 난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2015-08-13](Hit:13038)

우수인력 확보와 연구환경 개선 위해선 투자 필요해
2015년 1학기부터 모교 부총장제도에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교무부총장직과 행정대외부총장직이 폐지되고 교육부총장직과 연구부총장직이 신설됐다. 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과 연구기관으로서의 특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개편이다. 역구역량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 현실에서 모교 초대 연구부총장을 맡은 김수원 교우를 만났다. 연구역량강화 위해 연구부총장제 신설 - 연구부총장 제신설 취지는 무엇입니까? “기존의 대학이 교육과 행정 두 개의 중심축으로 운영되어 왔다면 오늘날의 대학에서는 연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모교는 연구를 새로운 중심축으로 판단하고 타 대학에 앞서 연구부총장제를 신설한 것입니다. 모교 전체 예산이 대략 7000억 정도인데 그 중 절반인 3500억 정도가 연구 관련 예산일 정도로 연구의 규모와 중요성이 커졌습니다.” - 모교의 연구비 현황과 확충방안은? [2015-08-13](Hit:12849)

임시창 유럽지부연합회장
임시창(철학69) 교우가 지난 6월 27일(토)과 28일(일) 열린 교우회 유럽지부연합회 총회에서 양해경(경영66) 교우 뒤를 이어 회장에 취임했다. 본보는 임 회장과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다. - 유럽지부연합회 회장에 취임한 소감 한 마디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 귀한 자리에 앉게 되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특히 지난 6년간 유럽지부 연합회를 이끌어온 양해경 회장의 헌신과 업적은 흉내조차도 낼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나 각 나라에서 응원해주시는 교우회 선·후배들의 격려로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 유럽지부연합회의 구성과 활동과정은? “2009년 4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교우회가 모여 발족을 한 것이 시작입니다. 같은해 터키, 카자흐스탄 교우회의 가입을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폴란드, 헝가리,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아랍에미리트, 남아공에서도 교우회를 결성했습니다. 현재는 유럽 외에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까지 유럽 총연의 지경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2015-08-13](Hit:14112)

<div align=left>40년 동안 쌓은 대학교육자이자 행정가로서의 경험을 세종부총장 직을 통해 쏟아내겠다는 조홍연 부총장.

세종캠퍼스 제2창학을 위한 퀀텀 점프!
조홍연(식공69) 모교 제14대 세종부총장은 지난 3월 17일 취임해 부총장으로서 첫 학기를 보냈다. 조 부총장은 취임 일성으로 ‘세종캠퍼스 제2창학’을위한 실천 정신인 ‘퀀텀점프QuantumJump’를 내세웠다. “퀀텀 점프란 세종캠퍼스 구성원들이 추구해야하는 마음 자세이자 우리 대학 발전을 위한 채찍입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경쟁 심화, 구조개혁, 정원감축 등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난관 극복을 위한 노력이 경쟁 대학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타 대학의 발전속도를 추월할 수 없습니다. 타대학이 1계단 발전할 때 우리는 100계단 도약해야 하고, 그래야 일류 대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신을 퀀텀 점프라는 말에 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획기적인 발전이 요구되며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성화를 통해 미래융합캠퍼스로 조 부총장은 세종캠퍼스의 현 상태를 ‘일시침체’로 진단했다. [2015-07-17](Hit:12870)
“오직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아, 꿈에도 잊지 못할 1944년 1월 31일 우리 학도병 모두의 마음이 착잡했던 그날의 밤이여. 우리들이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탄 것이 그 날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우리 동지들을 태우고 달리고 있는 이 북행열차는 압록강을 건너 안동을 지나고 청도를 거쳐서, 중국 본토인 양주에 도착했다. 우리 조국강토를 폐허화해가면서 그들의 전쟁전초기지화하고, 우리의 전국학도들마저 최후의 한사람까지도 싹 쓸어서 전지로 끌어갔다. 그때만 해도 일본군이 중국대륙을 의기양양 석권해 들어가고 있을 즈음이다. 하루에 100리나 되는 장정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으니 배가 너무나도 고팠고 조갈이 나서 중국인이 논벌에 마구 퍼다 버린 똥물을 논바닥에 엎드려 먹고 있노라면 일본인 병사가 내 궁둥이를 걷어차면서 제지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 물을 마시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나도 모르게 마셨다. [2015-06-15] (Hit:12662)

해방조국을 염원했던 학도병, 민족사학 품에 안기다
1909년생, 올해 나이 107세. 인터뷰 요청차 전화했을 때 수화기 반대편에서 들리던 임용목 교우의 목소리는 나이가 의심될 정도로 정정했다. 임 교우의 이력은 107이란 숫자만큼이나 특별하다. 일제감정기 학도병으로 끌려가 산전수전을 겪었다. 역사의 산증인으로 학도병을 대표해 직접 전쟁수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기적적으로맞은 조국 해방 1년 만에 조국 품으로 임용목 교우는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학도병으로 징집돼 중국 전선으로 끌려갔다. 죽음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그곳에서 임 교우의 분노는 커져갔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싸우는가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모두가 잠자고 있던 어느 날 아침, 허공에 대고 막사에 총을 갈겼지. 그렇게 총살당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해방 소식이 들려온 거야”사고를 조금만 일찍쳤다면 자신은 그대로 죽었을 것이라며 그는 껄껄 웃었다. 해방 뒤 조선 학도병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아무런 연고 없는 중국 땅에서 조국이 자신들을 불러주길 기다렸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없었다. 참다못한 임 교우는 직접 동료들은 이끌고 상해행 열차를 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1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1946년 6월의 일이었다. [2015-06-15](Hit:12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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