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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미국 투자자 마음을 훔친 월스트리트 고대정신
모건스탠리 입사 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퇴직연금컨설턴트 컨퍼런스에 참석한 이병선 교우.국제대학원 1기 졸업생들과 함께.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선 교우, 세 번째가 서진영 당시 국제대학원장.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 월스트리트를 누비는 고대출신이 있다. 중학교 때 알파벳을 처음 알고 대학 입학 전엔 외국 한번 나가보지 않은 토종 한국인이 금융전문지 파이낸셜타임스(FT) 선정 ‘은퇴자산관리자 톱 401인’에 선정됐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이병선(경제90) 교우 이야기다. 봉사활동이 인연이 돼서 메릴린치를 거쳐 현재 모건스탠리 기업 퇴직연금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미국 뉴욕에서 한국인으로 월스트리트를 주름잡기까지는 전문성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미국인들의 대화에 빠지지 않는 미식축구와 대학농구, 프로야구와 대중문화까지 두루 익히며 투자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아시아 컨설턴트가 낯선 미국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는 “I am not good at making small talks, but I live and breathe retirement plans 24/7(나는 잡담을 잘 하진 못하지만 24시간 내내 은퇴자산관리만 세우고 살아간다)”라고 말하며 신뢰를 쌓았다. 그 힘의 원천은 고대였다. “고대는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고대는 문화이며 정신이다” 코로나19 여파에도 모교가 그리워 서울을 찾은 이 교우의 고대사랑은 끝이 없었다.월스트리트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있나콜럼비아대 유학 시절 YTN 뉴욕 통신원으로서 미국 증시 소식을 아침 뉴스에 일보로 전하는 일을 한동안 담당했고, 졸업 후에는 뉴욕 라디오 코리아의 저녁 뉴스시간에 교민분들께 미국 증시와 경제 동향을 전하는 봉사활동을 했어요.... [2020-06-22](Hit:13)

데이터 분석해 비즈니스 모델 만드는 1세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하 교우는 다양한 주제의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발표의 정석’ 강연.밥 한 끼 사먹고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데이터’가 남는 세상이다. 우리나라 1세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하용호 교우는 데이터가 이제 하나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말한다. 하용호 XYZ벤처파트너스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데이터 사이언티스트는 멀티전문가빅데이터에서 의미있는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서 만들어내는 데이터 사이언스에는 프로그래머, 통계학자, 컨설턴트의 세 역량이 합쳐져 있다. 데이터를 잘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내는 통계학자나 머신러닝 분석가, 만들어낸 발견을 비즈니스 모델로 현업에 적용하고 결정권자들을 설득하는 컨설턴트로서의 역량이 필요하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일할 때는 회의하고 협의하는 데에만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 사람 또는 한 팀 안에서 할 수 있다면 빠른 속도로 가능해지는 거죠. 급변하는 세상에서 데이터 속에 숨겨진 비즈니스 기회를 빠르게 찾을 수 있는 멀티롤을 맡는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이제는 새로운 의미 만들어낼 때하용호 교우는 SK텔레콤이 데이터 사이언스를 처음 도입하던 때 스카웃 돼 경험을 쌓았다. 3년 정도 후 머신러닝, 데이터를 다루는 ‘넘버웍스’라는 회사를 창업했고 이를 카카오에 매각하면서 카카오에 합류하게 됐다. 카카오에서 다시 3년간의 일을 마친 후 지금의 새 회사를 열었다. 넘버웍스 매각으로 여러 방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면서 앞으로 뭘 해야 의미가 있을지 고민하게 됐다. 하 교우는 ‘계단을 차곡차곡 올라간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 [2020-06-22](Hit:26)

야구·씨름·유도 전문캐스터…가수로도 활동한 다재다능한 아나운서
“다시 태어나도 아나운서가 되겠다”는 이규항 교우. 아래 사진은 1969년 발매한 ‘이규항 히트앨범’. 현직 아나운서가 원로 아나운서를 만났다.현 교우회보 편집위원이 초창기 ‘고우회보 (교우회보의 옛 제호)’ 편집위원을 만났다.MBC ‘우리말연구팀’을 꾸렸던 이가 KBS ‘한국어연구회장’을 만났다. 이래저래 엮여 만난 사람은 이규항 교우.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쓴 채 마주 앉은 곳은 교우회보 편집실. 대면 인터뷰 90분, 그 앞뒤의 통화를 포함하면 170분 남짓 이야기를 들었다. 내용의 2/3는 방송언어, 특히 발음 관련한 것이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 후배이자 후학인 필자는 그의 웅변에 공감하며 주억거렸다. 우국어지언어운사(憂國語之言語運士)를 자처한 이 교우의 음성언어 얘기는 다른 곳에서 전할 수 있을 터, 말머리를 돌렸다.올해 초 <가요무대>에 출연하신 걸 봤다“<가요무대>에만 다섯 차례 나갔지. 1968년 <아나운서 온 퍼레이드>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임택근 방송계장이 ‘음반 내 보라’ 권유한 말이 씨가 된 거야. ‘네잎 크로바’로 ‘무궁화대상’에서 신인가수상도 받았는데, 배호가 부른 ‘파도’도 내가 부 뻔 했지….”  이 교우의 노래는 ‘나비바람’, ‘친구여 잘 있거라’, ‘친구’, ‘그리운 사랑’ 등 30여 곡에 이른다. ‘네잎 크로바’는 금영노래방(곡 번호 845), 태진노래방(곡 번호 1364)에서 부를 수 있다. 가수 이름이 ‘이규황’ 으로 나오긴 하지만.문약(文弱)할 거 같다는 얘기 들으신 적은?“그래서 유도를 시작한 거야. 문무(文武)-재덕(才德) 겸비! 와일드(wild)와 마일드 (mild)! 균형미를 갖춘 ‘서양인의 체격과 동양인의 정신을 갖춘 신랑’이라 했던 송민호(국문46) 교수의 주례사가 좋... [2020-05-22](Hit:78)

“바둑은 제 운명인 것 같아요, 그 열정을 모교에서 배웠답니다.”
지난달 10일 제7기 대주배 남녀 프로시니어 최강자전에서 조혜연 교우의 우승 소식이 들려왔다.2전 3기에, 삼세번 만에 첫 우승을 달성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동대문구에 위치한 그녀의 바둑 아카데미로 찾아갔다.“안녕하세요, 모교에서 오셨죠? 요즘 선배님들 응원에 늘 감사함을 느껴요”라며 명랑한 목소리로 반기는 조 교우. 그녀에게서 최근 스토킹 사건으로 힘들었음에도 선배들의 응원에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밝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바둑에 흥미 가진 7살, 그 매력은?“7살에 온라인으로 바둑강의를 접하게 되었는데요. 그 이후 바둑의 매력에 푹 빠졌죠” 어릴 때부터 집중력이 강했다는 조 교우, 부모님의 추천으로 만난 바둑과 함께 한지 어언 30년이다.조 교우에게 바둑의 매력을 묻자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한다.“그 작은 바둑 판 속에서 셀 수 없는 경우의 수가 나와요. 이에 대해 주체적으로 제가 수를 두고, 그 결과에 승복하죠. 어쩌면 바둑은 인생과 같아 재미있는 것 같네요.”올4월 대주배 우승에 큰 용기를 얻다“이번 대주배 우승은 30대 중반에 우승한 점에서 저에게 바둑기사로서 롱런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죠.” 11살에 입단한 조 교우는 바둑사회에서 30대란 많이 꺾이는 시기라 표했다. 조 교우는 자신의 세대에서 큰 성적을 낼 수 있음을 보여줬음에 의의를 느낀다고 한다. 2012년 이후 8년만에 첫 우승이니만큼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을지 감히 짐작해본다.재학시절, 총장실에서 바둑 두기도“바둑은 제 운명인 것 같아요. 그 열정을 모교에서 배우지 않았을까요? 하하” 냉정한 성적 지상주의의 바둑 사회는 ‘깡’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조 교우. “지축을 박차고 포효하는 그 힘. 고대가 아니었다면, 의기소침한 저는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있었을까요? 이번 대주배도 276 수만... [2020-05-22](Hit:91)

돌고 돌아 다시 찾은 야구 … 결국 야구는 내 인생
“안녕하세요 선수 여러분. 썩코 치의 야구쑈 썩코치입니다.”스스로를 ‘썩코치’라 칭하고 구독자들을 선수라 부르는 유튜버가 있다. 야구를 좋아하면 누구든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마음껏 야구를 즐기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 13년 간의 선수생활을 마치고 야구 콘텐츠 유튜버로 제2의 야구인생을 사는 윤석 교우를 만났다.야구선수로 활약한 학창시절“여느 또래 남자애들이 그렇듯 이, 처음에는 재미삼아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초등학교 4 학년 때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고,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하게 됐죠.” 윤석 교우는 11살 때 선수 생활을 시작해 중고등 리그를 거쳐 모교에서 야구 선수로 뛰었다.중견수로 활약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프로 진출의 문턱에서 고배를 마시자, 4학년 정기전이 끝나고 선수 생활을 마무 리했다. 윤 교우는 그 후 졸업까지 몇 달간 ‘대학생’다운 시간을 보냈다. “야구 외의 경험을 해본건 사실상 처음이었죠. 공부를 하는 것도,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모든 게 다 새로웠어요. 제가 언제 사회봉사단에서 벽화 봉사를 해보고 외국인 교환학생들을 만나봤겠어요. 이때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열심히 읽었던 거 같아요.”졸업 후 야구계를 떠나 방황하다졸업 후 윤 교우는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에는 2년간 대학원에서 스포츠경영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땄다. 그 뒤엔 한동안 야구계를 떠나 살았다. 소무 역, 해외 부동산 등 다양한 사업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한국에 돌아온 윤석 교우는 ‘내가 잘 알고, 잘 하는 일’인 야구를 다시 해보기로 했다. “온라인에 야구 코칭을 한다고 올렸어요. 동아리에서 많이 찾아오더라고요. 선수 출신한테 저렴하게 레슨을 받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유튜버 썩코치로 돌아오다윤 교우는 레슨 활동을... [2020-04-14](Hit:113)

최고 의술로 사회적 가치 실현하는 초일류 의료원을 만들겠습니다
김영훈(의학77) 교우가 작년 12월 모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에 취임했다. 모교 의과대학은 192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기원으로 삼아 오는 2028년 설립 100주년을 맞이한다. 2021년에는 모교 강남 진출의 교두보가 될 청담캠퍼스가, 2022년에는 최첨단융복합의학센터가 완공된다. 앞으로 8년 후로 다가온 설립 100주년, 모교 의과대학과 의료원의 비상이 궁금한 이때에 김영훈 의무부총장을 만났다. 10년 안에 10개 분야에서 국내 최고로“전임 이기형 부총장님을 비롯한 역대 부총장님들이 의료원의 역량을 잘 쌓아오셨습니다. 그런 업적을 이어받아 캠퍼스와 병원을 확장하고, 새로운 발전 전략을 실현하기에 최적의 시기에 의무부총장직을 맡았습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김영훈 부총장은 지금이 지난 10여 년간 의료원이 쌓아온 에너지를 폭발시킬 최적의 시기라고 강조한다. 취임사에서 그는 ‘초일류 의료원’을 목표로 제시하면서 이를 위해 10년 내 10개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10 The Best’ 전략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김영훈 의무부총장이 초일류를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1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할 때, 다시 말해 인류에 기여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해야만 초일류 의료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김 부총장은 ‘고대다움’에서 찾는다.“고대다움이 뭐냐고 물으면 흔히 자유·정의·진리라고 대답합니다. 의학자들은 거기에 더해서 내가 인류에 무엇을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우리 의료원은 그런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도록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최근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모교 의료원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확진 환자로 인해 폐쇄 조치를 단행하기도 했지만, ... [2020-03-18](Hit:154)

역사소설로 재구성한 기축옥사…16세기 사상사의 지형도를 그리다
최학 교우가 논산시 연산면 집필실 주변을 거닐고 있다. 이곳은 소설 속 주요인물인 송익필의 제자 김장생의 세거지였다.“소설가로서 확신도 자신도 잃어가고 있을 때,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입니다.”지난 연말 장편소설 《고변(告變)》으로 동리문학상을 수상한 최학(국문70) 교우의 수상소감이다. 최 교우는 재학시절인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폐광>으로 등단하고, 1979년 원고료 1000만원을 내건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서 《서북풍》 당선으로 주목받는 작가였다. 그런데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에도 이렇다 할 문학상을 받지 못했던 탓에 이번 수상은 그 자신이나 지인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고변》은 1589년(선조22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기축옥사)을 동인과 서인 간 붕당 정치의 관점에서 다룬 역사소설이다. 퇴계의 학맥을 이은 동인과 율곡의 학맥을 이은 서인 간 대립을 814쪽의 방대한 책 한 권에 담았다. 최 교우가 이 작품을 구상한 것은 1980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정여립 모반사건 다룬 소설 《고변》“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홍경래의 난을 다룬《 서북풍》이 당선돼 1980년 1월 1일부터 작품이 연재됐어요. 연재 당시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김용덕 교수가 연락을 해서 만났더니, 자기가 기축옥사에 관해 수십년 연구를 해왔는데 이건 서인들의 음모로 조작된 사건이다, 그런데 논문으로 써도 읽는 사람이 적으니 소설로 써달라며 자료 몇 개를 주고 가셨습니다.”최학 교우는 김용덕 교수에게 꼭 소설로 쓰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기축옥사에 얽힌 수많은 인물들의 정파와 가족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1981년 대전의 중경공업전문대학(현 우송정보대) 교수로 부임해 강의를 하게 되면서 소설 창작에 집중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작품화에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온 건 조선왕조실록 한... [2020-02-18](Hit:143)

‘디카츄의 사진창고’에서 마음의 고향을 만나세요
15년째 고연전 출사에 나서는 교우가 있다. “나한테 카메라는 충분히 있으니까 따로 사지 않아도 돼”라며 응원단 후배들을 위해 선뜻 촬영 장비를 대준다. 바로 페이스북과 유튜브에서 ‘디카츄의 사진창고’를 운영 중인 추영훈(경영05)교우다.“일이면 이렇게 오래 못하죠. 애착을 가지고 하는 취미라서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던 것 같아요.” 싸이월드로 시작된 사진창고유튜브 ‘디카츄의 사진창고’ 채널은 현재 3만7000명이 구독 중이다. 과반찍사를 담당하던 추 교우가 2006년 싸이월드에 사진을 올리며 ‘디카츄의 사진창고’가 시작됐다.“1학년 교양 과목에서 박성원(영문05)이라는 친구를 만났어요. 그 친구가 모교 두 번째 여자 응원단장까지 하게 되면서 응원단 사진을 많이 찍게 됐죠.”추 교우는 졸업 연도인 2011년 응원단 기획진으로 일하기도 했다. 같은 해 응원단 교우 모임인 호응회의 정식 인준을 받아 응원단 명예 단원에 임명됐다.“모교 응원사 50주년 편찬 사업이 진행 중인데 제 사진이 싣린다는 게 뿌듯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출사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출사는 언제일까. 그는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기억나고 생각되는 것들이 달라졌다고 말한다.“예전에는 14년도 전승과 같이 화려했던 순간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았어요. 하지만 내가 왜 사진을 찍는지 고민하다 보니, 최근에는 ‘대강당’, ‘사라진 설성 반점’ 그리고 ‘깡통 매점’처럼 그땐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의미 있는 것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 같아요.” 응원의 낭만과 본질을 담기 위해“무대 뒤에서 단원의 뒷모습이 보일지라도 응원하는 후배들의 모습을 찍고 싶어요.”고연전이나 응원 사진 찍을 때 추 교우가 가장 공들이는 부분은 현장감을 살리는 것과 응원의 본질, 쉽게 말해 ‘고뽕’을 담는 것이다. 15년간 사진 ... [2020-02-18](Hit:235)

가슴 뛰는 일, 국제 안보 전문가를 꿈꾸다
국제기구 진출을 위해 수없이 도전한 정상준 교우는 이달부터 뉴욕 소재 유엔사무국 대테러실(UNOCT)에서 근무하게 됐다. 범세계대테러 방지 역량 강화를 위한 국제회의를 준비하고 관련 부서와 연락을 담당하게 된다. 국제 기구 진출의 꿈을 마침내 이루게된 정상준 교우를 만나봤다.캐나다에서 대학 다니다 고대에 편입정상준 교우는 고등학생 시절 유학길에 올라 캐나다 맥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학교를 다니다 귀국해 군에 입대했고 공동 경비구역(JSA)에서 통역 업무를 맡았다. 군생활을 하며 국내에서 일하고자 마음먹게 됐고, 그렇게 모교 경영학과로 편입했다. “최고의 명문 사학에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죠. 그리고 맥길 대학교와 모교가 자매결연을 맺어서 교환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친숙하기도 했어요.”모교 편입 후에는 학업에 매진 하는 한편 다양한 경험도 쌓았다. 제대 후 2010년에 외교부 경제기구과에서 인턴을 했다.2012 핵안보정상회의에서는 파키스탄 총리의 의전 계획을 담당하는 국별 연락관으로 근무했다.“전담 공무원이 아닌 대학생이 이 역할을 맡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죠.” 이렇게 외교업무를 경험한 정 교우는 자연스레 우리나라에 도움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기아자동차에 입사해 해외영업본부에서 근무하게 됐다.국제기구를 향해 도전장을 내밀다치열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정 교우는 문득 보다 국제사회와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를 갖게 됐다. “해외영업 업무를 하며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는 법을 길렀는데, 이걸 실전에서 활용하고 싶었어요.” 고민 끝에 과감히 회사에 사표를 내고 주한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국방무관실에서 2년간 한-사 우디 국방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급여는 줄었지만 꿈을 향해 나아간다는 생각에 힘든줄 모르고 일했다.정 교우... [2020-01-17](Hit:218)

기업인·정치인·언론인·교육가…인촌의 길 따라 걸었던 성곡의 삶
김성곤 회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종우 이사장. 오른쪽 사진은 유진오 전 모교총장과 대화하는 김성곤 회장. 아래사진은 김성곤 회장이 기증한 시계탑.“동양통신 일본특파원으로 재직할 때 유진오 총장님이 일본에 자주 오셨어요. 한일국교정상화 수석대표로 오실 때도 있고 다른 일로 동경에 오실 때면 자주 뵈었지요. 서관이 완공될 무렵이었는데, 유 총장님이 외국 대학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탑이 있다며 김성곤 회장에게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드려 달라 하더군요.”성곡언론문화재단 한종우(영문51) 이사장은 성곡 김성곤 전 교우회장의 생질이다. 대구 피난 시절 입학해 서울로 온 이후엔 성북동 김성곤 회장댁에 거주하며 학교를 다녔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1960년부터 김성곤 회장이 설립한 동양통신 일본특파원으로 15년간 근무했다. 특파원 시절 유진오 총장은 일본을 방문할 때면 한 교우를 찾았고, 서관 건립 무렵 김성곤 회장에게 시계탑 기증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다.유 총장의 요청을 전해들은 김성곤 회장은 한 마디로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학교를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데, 돈은 내가 댈 테니까 자네가 알아보고 진행하라”는 말에 한종우 교우는 삼양사 일본지사를 통해 재일교포를 소개 받았고 시계 회사를 접촉했다. 회사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주 방문해 시계 제작 과정을 지켜봤다. 당시엔 시계 자체가 워낙 고가의 장비였고 스피커와 야광시설 등을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 모두 수입해야 했다. 시계가 완성됐지만 국교정상화 전이라 그 재일교포가 기부하는 형식으로 요코하마에서 배에 실을 수 있었다. 한 교우는 당시 김성곤 회장이 삼양사를 통해 지급한 돈이 “100만엔까지는 아니지만 수십만엔이었다”고 기억한다. 《고려대학교 100년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었던 서관 시계탑의 멜로디 시계는 196... [2019-12-17](Hit: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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