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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세종캠퍼스 40주년 대한민국 새 중심에서 힘차게 포효하다
모교 세종캠퍼스가 올해로 설립 40주년을 맞이했다. 세종캠퍼스는 1980년 ‘고려대학교 제2의 창건’을 목표로 중부권 요충지에 제2캠퍼스로 설립됐다. 당시 명칭은 조치원 분교였고, 1987년 서창캠퍼스, 세종특별자치시의 출범을 앞두고 2008년부터 현재의 세종캠퍼스로 명칭을 변경했다. 모교는 대한민국의 두 중심지인 서울시과 세종시에 거대 캠퍼스를 구축해 세계로 도약하고 있다. 설립 초기 시설 미비로 인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현재 세종캠퍼스는 5개 단과대학 체제로 융복합 특성화 캠퍼스를 항해 발전하고 있다. 세종캠퍼스 출신 교우 수는 3만 6000여 명이다. 2018년 출범한 세종연합교우회는 올해 3월 교우명부를 발간하며 교우회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① 1992년 세종캠퍼스에 학교 상징물로 세워진 호상 ② 과학기술대학 건물인 과학기술관 ③ 공공정책대학 건물인 공공정책관(구 인문대학) ④ 문화스포츠대학 건물로 지난해 준공된 문화스포츠관 ⑤ 글로벌비즈니스대학이 사용하는 석원경상관. ㈜삼천리 회장인 이만득(경영77) 교우 기부로 세워졌으며 석원은 이 교우의 선친인 이장균 삼천리 명예회장의 호 ⑥ 2011년 설립된 약학대학의 연구실험동 ⑦ 세종캠퍼스 도서관인 학술정보관. 시계탑에서 교가와 파랑새요가 울려 퍼진다. [2020-10-23](Hit:34)

초창기 역경 딛고 융복합 특성화 캠퍼스로 발돋움
① 1980년 7월 16일 열린 기공식. 이미 입학한 세종캠퍼스 80학번은 1년간 서울캠퍼스에서 수업을 들었다. ② 1984년 황량한 캠퍼스 풍경. 시설 부족으로 인한 학생들의 불만은 1980년대 후반 극단적인 양상으로 표출됐다. ③ 1995년 서창캠퍼스 교문 준공식. ④ 2005년 준공된 농심국제관. 세종캠퍼스 최초의 석조건물로 재학생 교양수업과 대형 강의가 진행된다. ⑤ 4개 건물로 구성된 세종캠퍼스 기숙사인 호연학사. 재학생의 약 40%인 2570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세종캠퍼스는 1980년 출발 당시 8개 학과 400명 입학 정원에서 현재는 5개 단과대학 1300여 명이 입학하고 있다. 교원은 588명, 재학생은 대학원생 포함 7000여 명이며 그 중 2570여 명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캠퍼스 면적은 42만6973㎡이다.열악한 환경에 극단적 갈등세종캠퍼스의 처음 명칭은 조치원 분교였다. 설립 초기 부지 매입 승인 문제로 교사 건립이 늦어져 초기 입학생들은 서울캠퍼스에서 수업을 듣거나 임시 조립식 건물에서 수업을 들었다. 주변 환경이 낙후돼 있고 포장도로가 없어 비가 오는 날에는 장화를 신고 진흙밭을 헤치고 수업을 들어야 했을 뿐 아니라 기숙사 등 편의시설도 미비했다. 고대신문 1983년 4월 5일자에서는 “농가의 닭장을 개조한 건물을 임대해 거주하고 있다. 일명 <닭장맨션>이라 불리는 이곳은 1개 건물에 15개 이상의 방이 만들어져 있다 … 수도·목욕탕 등 위생시설은 매우 부실한 실정이다”라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1982년 문리대학과 경상대학, 1987년 문리대학을 인문대학과 자연과학대학으로 개편했으며 ‘서창캠퍼스’로 캠퍼스 명칭을 바꿨다. 1988년부터 부총장제가 실시됐지만 캠퍼스 환경 개선은 이뤄지지 않았고 서울캠퍼스와 중복·유사학과 통폐합을 주장하는 재... [2020-10-23](Hit:30)

영원히 기억될 의인 이수현
세종캠퍼스 무역학과 재학 중 일본 유학을 갔다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고 이수현(무역93) 교우는 모교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다. 한국과 일본의 무역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이수현 교우는 직접 일본을 체험하고 싶어 4학년 1학기를 마친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2001년 1월 26일.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도쿄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술에 취한 일본인이 선로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그러나 빠르게 진입하는 열차를 피하지 못하고 숨지고 말았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이수현 교우의 숭고한 희생은 한국과 일본 사회에 큰 감명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이 교우를 기리는 뜻으로 성금을 모았고 유족은 2002년 1월 LSH아시아장학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세종캠퍼스에서는 2003년부터 매년 이수현 교우 추모식을 개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2020-10-23](Hit:34)

도전의 40년, 학교도 우리도 성장했다 … 후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세종캠퍼스 40주년의 소감최승욱 그동안의 40년은 도전이었고, 앞으로 100년 역사를 향해 도약할 것입니다. 40년 도전의 뜻은 올해 초 발간한 세종캠퍼스 교우명부로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출신 학과 이름이 많이 달라져 졸업생 연락망을 만들기 어려웠는데 드디어 연결이 가능해졌어요.송창환 처음에 학교에 왔을 때는 고대의 제2캠퍼스라고 부르기에는 물리적으로 약했어요. 최근 오랜만에 캠퍼스에 가보니 학교가 위엄을 갖췄더군요. 사람이 성장하는 것처럼 조직도 성장함을 느꼈습니다. 이제 세종캠퍼스가 교우회 행사를 할 수 있는 위치가 됐으니 우리가 좀 더 길을 닦아서 후배에게 더 나은 내일이 되도록 노력할 겁니다.박진규 세종에 갈 때마다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낍니다. 달라진 건물 모습도 멋지지만 후배들도 과거보다 어른스럽다는 게 느껴져요. 저도 후배를 볼 때 떳떳한 모습이 될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더 노력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학교는 우릴 방치했다”최승욱 80년대에 학교에는 건물이 달랑 두 동 있었어요. 기숙사도 없어서 학생들은 자취, 하숙을 했는데 주변 환경이 위험해서 여학생들은 불안해했죠. 통학도 많이 했는데 교통편이 정말 나빴어요. 고속버스도 없고 무조건 기차에 입석이에요. 학생들이 아무리 학교 측에 건의를 해도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냉정히 말해서 80년대에 학교는 우릴 방치한 겁니다.박진규 2000년대에는 기숙사가 있었고, 단과대별 건물도 다 있었어요. 그런데도 기숙사 수용률이 낮아서 성적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아도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상황이 열악하다보니 마음이 뜨는 친구들은 그냥 놀고, 공부하는 친구들만 열심히 공부했죠.최승욱 서울캠퍼스와 등록금은 똑같이 냈는데, 교육의 질은 너무 낮았죠. 전 통계학과인데 지도교수는 화학과였다니까요. 전공... [2020-10-23](Hit:44)

다시 만날 그날까지 고연전의 열기 잠시만 안녕
고연전은 ‘고대가 연전연승한다’는 뜻이다. 연대에서는 이를 연고전이라 부르는데 ‘연대가 고전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다. 올해 고연전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24년 만에 전면 취소됐다. 매년 가을 고대인과 연세인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축제의 무산이 아쉽기만 하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고연전의 역사와 흥미로웠던 종목별 경기 장면들을 되짚어봤다. 지난달부터 모교와 관련된 추억을 연재하기 시작한 송하춘(국문68) 명예교수도 때마침 ‘가을의 전설, 고연전’을 주제로 글을 보내왔다. [2020-09-14](Hit:66)

90여 년 이어온 승부의 역사 … 스포츠 넘어 양교 문화에 큰 영향 끼쳐
1930년 전조선축구대회 보연전을 알리는 동아일보 광고(왼쪽). 경기 결과는 연장전 끝에 보전이 2대3으로 패했다. 정기전 5전 전승 기록을 세운 2014년 농구 경기 후 승리의 폭죽에 기뻐하는 선수들(오른쪽 위). 선배가 후배들에게 맘껏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참살이길 뒤풀이축제에서 학생들이 뱃노래를 부르고 있다(오른쪽 아래).모교와 연대가 맞붙은 최초의 경기 기록은 1925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조선체육회 주최 제5회 조선정구대회 소식을 전한 당시 기사에는 “경성전문학교의 양웅인 연희전문학교 대 보성전문학교의 대전이 시작되야 서로 선전한 결과 보전에는 우퇴조(優退組)까지 남은 결과 보전이 쾌승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연전악전석패(延專惡戰惜敗)’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 경기는 1회전에서 만나 대결한 것이라 큰 이목을 끌지는 않았다. 장안의 화제였던 양교 응원전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첫 경기는 1927년 11월 3일. 조선체육회 주최로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8회 전조선축구대회 청년부 준결승전이다. 보전은 연전에 0 대 3으로 패했다.이후 축구와 농구를 중심으로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1942년까지 축구는 28차례 결승에서 맞붙어 14승 14패의 전적을 기록했고 농구는 56차례를 맞붙어 28승 28패의 전적을 기록했다.해가 거듭되며 모교와 연희전문학교의 대결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돼 동아일보는 양교의 경기가 있을 때 특별히 광고를 내기도 했다. 경기뿐 아니라 양교의 응원전도 큰 관심거리였다. 보성전문 학생들은 꽹과리, 장구, 날라리 등의 민속악기를 두드리고 불며 교가와 민요를 불렀고 연희전문 학생들은 양악대를 앞세우고 개선행진을 벌였다.보연전은 1943년 일제가 조선에 징병제를 도입하고 학교 체육을 금지시키며 체육활동을 총검술로 대신하게 하면서 막을 내렸다.한국 체육 ... [2020-09-14](Hit:87)

‘고연민족해방제’에서 ‘사이버고연전’까지, 시대별 다양한 모습
2013년 정기전에는 MBC ‘무한도전’ 출연진이 양교 응원단으로 참가했다(왼쪽). 오른쪽은 2016년 사이버고연전으로 양교생은 2011년부터 게임전을 펼치고 있다.시대의 변화에 따라 고연전도 다양한 변화를 맞이했다. 대학생들의 반정부 투쟁이 활발했던 시기에는 고연전 명칭이 ‘고연민족해방제’로 바뀌어 경기 후 시위로 이어졌다. 1996년에는 고연전 후 뒤풀이 과정에서 이화여대 학생이 부상을 당해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2003년에는 고연전이 지나친 학벌주의를 조장하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소외시킨다는 이유로 안티고연전 운동이 벌어졌다. 지금은 모두가 함께 즐기는 고연전을 위해 장애인 전용 관람석도 설치된다. 2013년에는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고연전에 참가했다. 모교 응원단에는 유재석, 박명수, 하하, 정준하가 연대 응원단에는 노홍철, 정형돈, 길이 참가해 열띤 응원을 펼쳐 큰 화제가 됐다. 21세기에 들어서 양교의 대결은 온라인 공간까지 확대됐다. 2011년 모교 게임동아리 ‘디럭스’가 정기고연전 기간동안 사이버고연전을 개최했다. 이후 지금까지 매년 다양한 게임 종목으로 경기를 펼친다. 정기전이 취소된 올해 양교생은 11월 7일 사이버고연전을 연다. [2020-09-14](Hit:88)
고연전, 뜨거웠던 그 순간을기억하나요?
고연전은 1965년부터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럭비, 축구 5개 종목 경기가 펼쳐지는 정기전으로 정착했다. 양교 선수들이 펼치는 투혼의 경기는 매 경기 명승부를 연출한다. 뜨거운 응원전이 함께하는 정기전은 그 자체로 잊지 못할 추억이 된다. 여기에 뜨겁거나 흥미로웠던종목별 경기 한 장면씩을 제시한다. 이 사진들을 실마리로 삼아, 교우 저마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명경기 명장면을 떠올려보길…. 김동은 기자고연전 사상 최대 스코어 차 11:0압승을 거둔 선수들이 승리호를 외치고 있다.1987년 야구고연전 첫 경기였던 야구는 막상막하일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을 뒤엎고 11대 0이라는 큰 스코어차로 압승을 거뒀다. 모교는 5회말 공격에서 2번 정영진(경영84) 선수의 땅볼을 연대 유격수 최해명 선수가 잡아 2루에 던진 볼이 빠지는 사이 2, 3루 주자가 모두 홈인. 2점을 선취했다. 계속된 2사 1, 3루 찬스에서 3번 김경기(법학86) 선수가 라이트쪽으로 적시타를 때려 내 다시 1점을 보태면서 3대 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6회초 무사 1, 2루의 위기를 잘 넘긴 모교는 7회말 타자 일순하면서 대거 5점을 뽑아내 승부를 완전히 판가름냈다. 이날 경기의 히어로 김경기 선수는 연대 응원석에 떨어지는 3점 홈런포를 작렬함으로써 연대를 완전히 침몰시켰다. 다른 히어로 박동희(체교86) 선수는 삼진 7개를 빼앗고 단 3안타만 내주며 호투, 완투완봉승을 거뒀다. 이 경기는 지금까지도 고연전 야구 사상 최대 스코어 차로 기록되고 있다.16년 무승의 한을 전승으로 풀다17년 만의 승리에 환호하는 선수들.2014년 빙구모교는 2014년 정기전 역사상 최초 전 종목 승리를 이뤘다. 그중에서도 첫날 빙구 경기는 16년간의 무승을 끊고 더욱 값진 승리를 거뒀다. 경기 시작부터 주장 오세안(체교11... [2020-09-14] (Hit:97)

신문이 신문 했다 - 《고대교우회보》 창간 50주년에 부쳐
《고대교우회보》 창간 50주년 축시를 쓰려고2020년 7월 10일 자, 지령 제600호를 펼쳐보았다.“군인은 고대에 왔다. 짓밟았다.그리고 학교 문을 닫았다. 「10월 15일」”이렇게 적은 1971년 11월 5일자 《고우회보》 제16호 1면이,600호 신문의 1면에 문득, 들어가 있었다.또, 그날의 14면은 오늘의 3면에서이렇게 피 흘리고 있었다.“캠퍼스 삼킨 최루탄 세례”“곤봉과 군화의 난무 속에 비명과 통곡 가득”“피 흘리며 잡혀가는 학생에 교수들 흐느껴”“흥분과 분노 속에 투석으로 맞서기도”“총구 앞에 가슴 내민 남학생 「쏠 테면 쏴라」”“도서관엔 주인 잃은 책가방 어지럽고”모든 것이 마흔아홉 해 만에 뜨겁게, 돌아와 있었다.우물 밑에서 깊이 올려다보는 얼굴처럼큰 바다에 떠오른 큰 배처럼,제자리에 처음 놓여 있었다.600호 가운데 딱 한 번 이 16호를 발행하지 못했던 것은 그러니,위수령의 총칼에 신문을 통째 빼앗겼다는 말이 아니다.편집국장은 초교지를 편집인에게,편집인의 유족들은 그걸 다시 모교 박물관에,빼돌리고 전달하고 깊이 숨겨서 피 묻은 단 한 부를,역사에 발송했다는 뜻이다.지옥에서 돌아온 ‘레버넌트’같이교정에 그렁그렁한 꽃나무와 꽃 귀신들같이지령 제600호 1면에 비로소 모셔진,지령 제16호의 1면을 오래 들여다본다.그리고 이렇게 고쳐 읽는다.“군인은 고대에 오지 마라. 짓밟지 마라.그리고 학교 문을 열어라. 「10월 15일」”고대는 살았고독재는 죽었고신문은 적었다.물이 아래로 흐르듯 구름이 하늘에 떠가듯자연스럽게,아니, 물이 거꾸로 흐르듯구름 하늘에 로켓을 쏘아 올리듯 자연스럽게,그러므로 반역처럼 자연스럽게,적어온 펜과 종이와인간의 굳은 손.《고대교우회보》 50년이여,경하하리로세.1971년 11월 5일의 제 16호 《고우회보》여 단 한 부여,경하하리로세.고려대학교가 고려대... [2020-08-13](Hit: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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