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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자명고> 사전 만들기
강재형(영문82) 편집위원MBC 아나운서 국장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작은 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받은 국어사전. 나무 잎사귀 무늬로 둘러싸인 동그라미 안에 ‘賞(상)’이 찍혀 있던 콘사이스 사전의 쓸모는 크지 않았다. 형제들이 ‘공용’으로 쓰던 큼지막한 국어사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집을 거쳐 지금 집 책꽂이에 있는 그 사전은 여전히 제 몫을 하고 있다. 중학교 때부터 ‘사전 찾기’는 곧 영어 사전을 뒤적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은 숙제와 시험 성적보다 ‘영어 사전 지참’을 더 중요하게 챙겼다. ‘하루 한 장씩 영어 사전을 찢어 먹는 친구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염소도 아니고, 진짜 그런 애가 있을까 싶었지만 ‘영단어 암기’의 한 방법으로 그만한 게 없다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들렸다. 안암의 언덕을 오갈 때 책가방에는 영영 사전이 들어있을 때가 많았다. 학보사 기자라는 명분(이라 쓰고 핑계라 읽는)을 내세우며 결석을 밥 먹 듯 하면서도 그래야 할 거 같았다. ‘영문(英文)도 모르는 영문과’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주고받을 때였으니까. 어찌어찌 방송사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는 국어사전을 끼고 살았다. ‘걸어 다니는 국어사전이 되겠다’는 치기어린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이 되기는 했지만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아나운서로서 헛산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엊그제 책 한 권을 받았다. 한동안 말 관련 모임을 함께했던 이가 펴낸 것이다. 《사전 보는 법》에 ‘지식의 집을 잘 짓고 돌보기 위하여’란 부제가 붙어 있다. 공감을 넘어 동감한다. 묵직한 종이 사전이 CD-ROM을 거쳐 온라인으로 들어가면서 어느새 사전은 ‘찾기’가 아닌 ‘검색’의 대상이 되었다. 내게 ‘찾기’가 능동이라면 ‘검색’은 왠지 수동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제 마음이 내켜서(능동)’ ‘수동(남으... [2020-09-14](Hit:3)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젊음으로, 나는 외친다, 고로 존재한다
코로나로 올해 고연전이 취소됐다. 코로나 이후 고연전 응원문화가 어떻게 바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사진은 1969년 고연전 중간행사로 열린 모교 응원단과 농악대의 차전놀이. 사진 : 김호영(기계공68) 명예교수이를테면 나는 ‘고연전’을 고연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연고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연대생들은 우리의 고연전을 고연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연고전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축제를 두고 이와 같이 두 학교가 각각 자기 학교의 이니셜을 앞에 놓겠다고 아웅다웅 다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다. 고연전이 하나의 염원이고 축전이지 왜 싸움이냐. 그래서 한때는 ‘전’을 ‘제’로 바꾸어 '고연민족해방제'로 불린 적도 있었다. 그게 맞다면 그때는 고려대가 먼저 상대방 이니셜을 앞세워 ‘연고민족해방제’로 불러주었어야 옳았을 것이다. 내가 나의 이니셜을 앞세우기 전에 상대방 이니셜을 먼저 불러준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미덕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다시 ‘제’를 ‘전’으로 바꾸어 고연전으로 돌아온 것이 전부였다.설마설마 하던 20 20정기고연전이 취소되었다는 뉴스를 오늘 접했다. 코로나19가 봄부터 횡행하더니 마침내 가을행사까지 차단한 모양이다. 코로나 예방수칙으로 제1원칙이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두기였다. 고연전 행사가 바로 그 조항에 저촉되었을 것이다. 프로야구처럼 무관중경기를 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운동경기라도 고연전은 경쟁이 아니라 축제라는 점에서 프로야구와 다르다. 같은 야구라도 프로야구는 무관중경기가 가능하다지만, 고연전은 응원 없이 어떻게 놀이가 가능하겠는가.고연전은 뭐니뭐니해도 응원전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고연전의 무엇이 그토록 나를 설레게 했던가, ... [2020-09-14](Hit:2)

우리는 삶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노래를 듣는다
“자네들, 피가 끓지 않나?” 재학시절 들었던 강만길 교수의 질문에 김종진 교우는 지금도 열정에찬 음악으로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사진 : 김영숙(서문83) 교우어린 시절, 후암동 그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나이트클럽 밴드 기타리스트였던 아저씨를 동경하며 그들의 세계를 엿보던 소년은 공고에 진학해 용접을 배워 디트로이트로 가서 음악을 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진실인지 형이 꾸며낸 말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대학을 보내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벽에 ‘4당 5락’을 붙여 놓고 그는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한쪽 벽면엔 플리트우드 맥의 스티비 닉스 브로마이드를 더 크게 붙여 놓았지만 말이다. 그가 이번 달 인터뷰의 주인공 사학과 81학번 김종진 교우이다. 어릴 때 사고로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은 그의 별명은 반토벤이었다. 작사 작곡은 본인의 몫이지만 함께 음악을 만들어내고 연주하는 팀 생활은 그의 결핍을 채워주는 힘이 되었다. 공연 중인 김종진 교우(왼쪽 두 번째).비 오는 날이면 강의실에서 나가던 학생대학 시절, 그는 늘 강의실 창가에 앉았다가 비 오는 날이면 강의 중에도 주섬주섬 가방을 싸서 밖으로 나갔다. 지금도 너그러우심으로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지동식 교수님께서 왜 자꾸 강의 시간에 나가냐고 물으셨단다. “비가 와서요.” 라는 그의 대답도 재미있지만, “비 그치면 돌아와라.” 라고 대답하셨다니 어쩌면 그를 대한민국 최고의 대중음악인으로 만든 힘은 고대의 강의실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의 진짜 전공을 ‘음악철학’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음악은 취향의 차이만 있을 뿐, 음악 자체에는 이견이 달리지 않는다. 그는 그저 여러 장르의 음악 중에서 대중음악을 택했을 뿐이다. 노래를 써서 부르면서 저 사람에게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의 소임을 다 하... [2020-09-14](Hit:2)

답답한 공포감 속에서 찾은 소중한 것들
스페인 세비야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상훈 교우 가족. 오른쪽 사진은 온라인으로 스페인 음식 강좌를 진행하는 이상훈 교우. 이제 다섯 달이 다 되어간다. 지난 3월, 나라 전체가 봉쇄되면서 모두의 삶이 바뀌었다. 마스크와 장갑, 모자로 몸을 꽁꽁 싸맨 채 일주일에 한 번 장을 보러 나가거나 이틀에 한 번 쓰레기를 버리는 일 말고는 집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약국과 슈퍼 이외에는 철저하게 영업이 통제되었고, 차량은 통행증이 필요했으며, 특수 직업군을 제외하고는 재택근무가 강제 시행되었다. 공항도 폐쇄된 마당에 이 나라밖으로 뜰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답답한 공포감 속에서 숨을 고르고 한번 돌이켜 보았다. 한국의 세련된 속도감보다는 투박한 여유를 좇아 이 나라로 날아왔던 그때의 마음가짐을 되새겨 보았다. 그제서야 조금씩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많은 것들비로소 진짜 바르셀로나를 보게 되었다. 전 세계 최다라는 관광객들의 발길에 가려져 있던 거리 위의 작은 조각이, 건물의 장식이, 작은 산책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소음과 공사 기계음에 가려져 있던 작은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이웃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봉쇄령이 풀리기 전까지 저녁 8시마다 모든 사람들이 발코니로 나와 박수와 응원의 경적을 울려주었다. 목숨을 내놓고 사지에서 고생하는 의료진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그동안 마주칠 일 없던 이웃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어느덧 건너편 발코니에서도 우리 딸의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나의 딸을 알게 되었다. 아이와 오래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의 웃음과 울음이 어떤 뜻일까,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느덧 딸의 언어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 [2020-09-14](Hit:2)

고대박물관 소장 걸작선[19] 김경승 ‘농가풍속’ (1952년)
김경승(金景承 1915~1992)은 개성 출신으로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우리나라 동상 조각의 선구자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교 본관 앞 인촌동상도 그의 작품이다. ‘농가풍속’은 김경승이 한국전쟁 당시 피난하여 통영 등지에 머물러 있을 때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한쪽 팔로 천장에 매달린 끈을 잡고 한가롭게 담소하며 방아를 밟는 밝은 색 한복의 젊은 아낙들과 반대편 쪽에서 곡식을 방아에 넣기 위해 홀로 앉아 있는 흰 한복의 여인이 그려졌다. 농가의 일상을 담은 풍속도이지만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일상적 삶이 더욱 가슴 깊이 다가왔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가 잠시 비켜간 남도의 평화로운, 역설적인 풍경이다. 박유민(한국사98) 모교 박물관 학예사 [2020-09-14](Hit:2)

포토 뉴스 - 유상옥 교우 ‘호랑이는 살아있다’ 특별전 개최
유상옥(상학55) 교우가 설립한 코리아나미술관에서 ‘호랑이'를 주제로 한 특별기획전 <호랑이는 살아있다>를 이달 7일부터 12월 19일까지 개최한다. 유상옥 교우는 이번 전시에서 오랫동안 수집해온 호랑이 관련전통 유물과 회화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 사진 속 작품은 김기창의 ‘신비로운 동방의 샛별’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제작된 석판화이다. [2020-09-14](Hit:2)

<자명고> 추억이랑 살래? 나랑 살래? - 교우회보 50주년을 맞아
금교돈(교육79) 편집위원조선교육문화미디어 대표이사 고대는 그렇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말석이었다. 19년 전 교우회보 편집위원으로 데뷔한 후 한동안 존부존(存不存)의 신세였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해박과 청산유수에 주눅들어 침만 꼴깍 삼키다가 회의를 마치곤 했다. 머리로는 감당이 안 되니 묵직한 엉덩이로 버텼다. 뭉개고 뭉갠 결과, 최장수 편집위원이라는 ‘불편한 영예’를 마주한다.교우회보는 이렇다. 회보 기자들이 매달 회보를 제작하면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편집위원들과 함께 편집회의를 연다. 이날 기자들의 영혼은 가출한다. 선배 편집위원들이 쏘아대는 속사포 지적에 ‘뼈와 살이 타는 밤’이 된다. 선후배간의 친선게임으로 오인하고 격려차 참석했던 교우회 부회장 한 분이 그랬다. “장난 아니군.”교우회보가 쉰 살이 됐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다. 노련하되 노쇠하지 않고, 무르익되 물러터 지지 않고, 자신에 차 있되 고집부리지 않고, 상대를 리드하고 안아주고 토닥거릴 줄 아는 나이다.1970년 8월《고우회보》라는 이름으로 창간해 월간 타블로이드 판형을 유지하고 있다. 화장술은 더러 바뀌었지만 한결 같은 얼굴이다. 대학 동창회보의 효시라느니 선두주자라느니 하는 수식어는 못난이들의 잘난이 코스프레일 뿐이다.교우회보의 역사상 효시는 1907년 보성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 만든《친목》이다. 교우회가 창립한 해다.《친목》 이후에도《보성》,《보전교우회보》,《고우》,《교우통신》 등등의 교우회 소식지 들이 명멸했다. 1907년을 원년으로 삼는다면 교우회보의 나이는 113세가 된다. 굳이 나이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숫자 홀릭이나 과포족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해 1월부터 교우회보에 ‘창간 1970년 8월 5일 / 교우회보 전신《친목》 1907년 3월 15일 창간’이라고 표기한 ... [2020-08-13](Hit:32)

대중문화계 고대인을 찾아서 [8] - 나이드는 만큼 행복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그만큼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영화 <국제시장>과 <해운대>, 그리고 코믹 영화의 원조격인 <두사부 일체>를 기억하는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바로 자랑스러운 고대의 교우 윤제균(경제90)이다.광고회사 직원에서 흥행보증 영화감독으로IMF 때 다니던 광고회사에서 무급 휴가를 주는 바람에 결혼 4개월이던 그는 대출로 산 23평 연립 신혼집의 방에 틀어박혀 아내의 눈치를 보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나리오를 썼다. 생전 처음 계산도 지식도 없이 썼던 시나리오가 공모에서 당선되고도 그는 자신이 창작을 하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이후 우연한 술자리의 약속 때문에 조폭이 고교에 다니는 이야기에서 착안한 <두사부일체>의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대본이 완성은 되었지만 영화사가 작으니 투자를 받지 못해 감독도 배우도 정하지 못했다. 내친 김에 윤 교우는 자기가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많은 투자자들이 불안 해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레디, 액션!”을 호기 있게 외쳤으나 카메라 감독의 “컷” 소리에 당황한 윤 교우. 알고 보니 카메라가 돌아가기도 전에 액션을 지시했던 것.그 정도로 미숙한 아마추어였던 그가 만드는 작품마다 흥행을 보증하는 믿고 보는 감독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감독은 director이지 master가 아니니까요. 선장이 배의 구조를 다 알 수는 없잖아요. 진실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그걸로 감독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눈물과 코미디의 한계가 불분명한 날것 느낌의 신선한 영화 <두사부일체>는 그해 개봉 당시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과의 경쟁에서 대단한 흥행을 이끌어냈다. 이후 관객들의 비난을 받는 영화도 만들어 한동안 대인기피... [2020-08-13](Hit:54)

고대박물관 소장 걸작선[18] 김형구 ‘새와 소녀’ (1961년)
김형구(金亨球, 1922~2015)는 함흥에서 태어나 도쿄 데이코쿠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동성고등학교 미술교사와 세종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대상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현실을 충실하게 모방하고 재현한 자연주의적 표현방식을 구사했다는 평을 받는다. ‘새와 소녀’는 석탄 난로 옆에 포즈를 취한 소녀와 새장 안의 새를 주요 테마로 한 작품이다. 보색 대비에 의한 밝은 색감이 지배적이지만 소녀의 경직된 모습과 얼굴에서 수동 적이고 우울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새장 안에 달이 놓여 있는데, 새 뿐만 아니라 달마저도 갇혀있는 상황은 소녀의 굳은 목과 우울한 얼굴로 이어지면서 소녀의 정신적 상황을 암시한다. 박유민(한국사98) 모교 박물관 학예사 [2020-08-13](Hit:51)

데이터 뉴스 - 교우회보 50년간 총 발행 면수 1만5352면
지난 600호까지 고대교우회보의 총 발행면수는 1만5352면이다. 교우회보는 1970년 8월호 12면을 시작으로 지면 수를 늘려왔다. 모교 100주년이 되던 2005년부터 40면으로 지면을 확대하고 본지(24면)와 간지(16면 S1~S16로 표시)로 구분해 발행했다. 교우회 창립 100주년 이듬해인 2008년 1월호는 72면을 발행했다.2011년 10월호부터는 32면을 기준으로 발행하며 신년회, 고연전 등 큰 행사가 있는 경우에는 증면했다. [2020-08-13](Hit: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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